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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을 가진 이승만에 대한 평가 (이승만의 업적은 악행이다?)

  • 작성자: 기레기아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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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92159
  • 2016.03.31

 

이승만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이유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시기에서 재뿌리기, 초치기, 배신과 분열.... 등등의 장면에 이승만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죠. 역사학자들은 이승만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조중동(?)이라 일컫는 한국 사회의 보수적 신문들은 이승만 기념 사업회를 연다던가, 이승만에 대한 기사를 미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글이 나온다 하더라도 사실 별 관심조차 끌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에 대한 신문 기사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에서 기술된 것들이 많았거든요.

 

이승만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5대손입니다. 그러나, 이미 양녕대군 8대손부터 종친에서 멀어졌고, 12대손 때부터는 종친 대우를 못받았습니다. 또한 과거 급제자도 오랫동안 없던 관계로 양반대우 받기도 힘든 가문이었죠.

 

그러나, 이승만이 20살이 되기 전, 갑오개혁이 실시되어 과거라는 것이 없어지고 능력사회로 전환되어 버렸습니다. 20살의 이승만은 과거 시험 대신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 들어가 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전국민이 일본의 강요로 머리를 깍아야 하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승만은 단발령에 찬성하였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신교육을 받은 자신을 자랑스러워 했고, <부모가 주신 머리를 자르는 것>보다는 <깨끗한 두발>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나봅니다.

 

1896년 아관파천이 발생하고, 대한제국의 정권이 친미적 성격을 가진 서재필 등의 정동구락부가 주도하자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제학당은 상당히 대우받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이 학교에서 협성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한국 최초의 신문인 <매일신문>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신문에 글을 쓰면서 그 자신의 입장은 <동양평화론>의 관점에서 기술했다고 합니다. 동양평화론이란,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 청, 대한제국은 사로 친하게 지내야 할 동양의 친구들이므로 일본과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관점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일본 관리들과 이야기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일본을 분석하지 못한> 관점이었죠. 

 

이승만은 자신의 본격적인 정치 입지를 다지고, 존경하는 친미적 경향의 서재필을 본받아 독립협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절영도를 조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등의 글을 쓰고, 서재필의 미국추방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는 등 독립협회의 일에 열성적이었고, 만민공동회 활동도 하였습니다.

 

특히, 독립협회가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에 의해 해산될 때, 이승만이 앞장서서 몸으로 독립협회의 해산을 막고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서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국민들에게 멋있게 각인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거두 박영효의 쿠테타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습니다. 24살때부터 6년간이었죠. 재미있는 사실은 감옥에 갖힌 이승만은 친미파로서 죄수로서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이 어려울 때는 미국과 같은 기독교 문명국이 조선을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미국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그의 사상이 감옥에서 완성된 것이죠. 이후 이승만의 사상은 다른 민족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사상인 <외교독립론>이었습니다. 친한 친구(외국)을 많이 사귀면, 그들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책 제목은 멋있어 보이죠? 그러나 내용은 형편없는 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힘든 이유인 세금이나 사회 모순, 지주제도 등의 이야기는 없고, 단지 백성들이 현실을 깨우쳐야 한다, 외국과 친구로서 만나야한다 등의 공상적인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죠.

 

그런데, 이승만이 생각한 가장 좋은 친구란? <미국>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일본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자들은 친일파로서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좋은 친구인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수호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승만은 <친미 기독교주의>로서 자신의 역사관을 고수해 가기 시작합니다.

 

이승만의 이 역사관이 일제시대 우리 독립운동사에 하나의 비극으로 남게 됩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출소한 뒤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죠. 당시는 1905년을 전후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열혈적인 독립운동을 해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많은 선교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과는 좀 달랐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보다는 선교운동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에게 많은 독립 외교 활동을 부탁하였습니다. 특히,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한국의 독립을 강화회의에서 상정해달라는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친구인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믿은 것이죠. 그러나, 루즈벨트는 당시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 요구는 묵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한국인들을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했다는 사실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기대치와 평가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실제 해낸 일은 없지만, 친미파인 이승만이기에 시도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부탁하면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거두가 되어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정녕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을까요?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로,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승만이 가기를 독립운동가들이 원했을 때, 그는 <미국 명문대학 학위를 받아야 국내 활동이 편해지기 때문에> 거부하였습니다. 또, 장인환 등이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슨을 죽인 것 등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이 원한 건 미국인들이 원하는 기독교적인 외교 활동이었고, 그 외의 것들은 자신에게 불필요할 경우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1910년 공부를 마친 이승만은, 경신학교 교수가 되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신학교의 창립자 언더우드와의 계획이 순조롭지 못해 그는 기독교 관련단체인 YMCA의 기독교 교육운동가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조선인에게 전달하겠다는 선교가의 마음자세였지, 독립운동가의 자세가 아니였습니다. 실제, 그는 반일운동이나 혁명을 하고 싶은 의사가 없는데, 일본 총독부가 오해하면 어쩌나하는 것을 우려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한국에 돌아와서 성경연구반을 만들고, 반일운동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미국 유학과 기독교 정신이 꿈을 이뤄줄 것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1911년 신민회의 105인 사건이 터지면서 민족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 조치가 있자, 그 역시 민족운동가로 분류되어 체포될 뻔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협조를 얻어 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망명 갈 때의 신분은 세계감리교 대회 조선 대표였죠.

 

다시 미국에 건너간 그는 학생복음회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독립을 주장하였습니다. 조선 독립이 아니라, 교회 독립이었죠. 이렇게 다시 떠난 그는 30년 넘게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연줄을 맺게 됩니다

 

이렇게 1910년대의 이승만은 실제 이승만이 독립을 위해 한 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그가 친미파로서 당시 세계를 이끌어가는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다는것입니다.

 

둘째로는 그가 조선 왕조의 왕족에 속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역사적 현장속에 <그가 이상하리 만큼 꼭 있었다>는 점입니다. 독립협회의 해산 때 그는 열혈 영웅이었고, 파리 강화회의를 앞두고는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을 청원했던 영웅이었습니다.

 

이승만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그는 <슈퍼스타>로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필요로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승만은, 3.1운동 직후 여러 가지 타이틀을 확보합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회의의 의장이자, 국내의 독립운동단체인 한성정부의 대통령이었죠. 당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려고 했는데, 그 단체들마다 이승만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각종 독립운동 단체는 이승만의 한성정부를 계승하여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정하고, 이름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따르기로 합의하죠.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풍지박살이 나고 분열이 됩니다. 당시 신채호, 안창호 등 대부분 민족주의자들은 일본과의 결사항쟁 및 독립군 육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조와 기독교 정신의 확장을 통한 <외교독립론>을 주장합니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의 이 외교독립론 주장으로 임시정부는 분열되고 맙니다. 임시정부를 다시 만들자는 창조론과 이승만을 버리고 다시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개조논의 까지 나왔고, 거기에 이승만의 몇 가지 비리가 더해져 이승만은 쫒겨나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결국 사분오열 되면서, 임시정부의 성격을 잃었고 이 망가진 임시정부를 죽기살기로 수습하여 다시 일으킨 사람은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 선생님이 이끌어간 임시정부로, 대통령제가 아닌 주석제 또는 국무령제(장관제도)의 임시정부입니다.

 

이후 이승만은 계속적으로 외교독립론만을 주장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광복하는 날까지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실세들과 많은 친분을 맺어두었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중요한 미국에서 기독교 실세들과의 친분은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죠.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이승만은 미전략사무국 문관 대령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 때 맥아더와 하지는 이승만의 귀국을 돕고 그를 협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해방된 한국사회에서 좌파를 억누르고 친미파의 과도정부를 만들기 위한 책략이었습니다.

 

특히 임시정부의 요직에 있었던 이승만은 맥아더와 하지에 의해 그 명성이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부풀려 졌습니다. 국민들은 이승만이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승만은 귀국하자마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통합적인 정치행보에 들어갑니다. 그는 극우적인 성향으로 공산주의자를 싫어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초기에는 <공산주의 경제정책도 채용할 점이 많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밑으로 모인 단체는 친일파의 잔제세력과 극우파인 한민당 세력 뿐이었습니다. 중도좌파와 극좌파는 친미적인 이승만을 경계하였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이승만의 또하나 아쉬운 점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한민당>이기에 그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처벌을 은근히 반대한 것입니다. 이 점은 민족사에서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되고 맙니다.

 

또, 이승만은 당시 김구 등 중도파들과 함께 미국, 소련의 신탁통치를 결사 반대하였는데, 이것은 국민들에게 이승만이 민족주의자라는 인식을 가져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운형등이 세운 <조선인민주의 민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을 분열시키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대로 국가가 세워져야 자신이 주도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초기에 공산주의와 연대할 수 있다던 이승만이 그 말을 한지 얼마 안되어 공산당을 <소련의 사주를 받는 자>들로 매도하고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그 시점이 공산주의자들이 친일파 처벌과 반민족주의자 처벌을 강도있게 원했고, 여운형 등의 국민대표가 세운 <조선 인민주의 민주공화국>을 옹호한 시점과 일치합니다. 

 

1947년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구와 연합하여 우파의 범 신탁통치 반대세력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김구와 연합한 이승만은 하지 등 미국세력을 등에 업고 김구를 넘어서게 됩니다.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세력 중 미국은 이승만을 의장에 선임하고, 김규식과 김구는 부의장과 총리에 임명하였습니다.

 

김규식과 김구는 이 결정에 의의를 가지지 않고, 남북 통일 노선을 추구하는데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김규식과 김구는 남북한이 하나로서 투표하고, 남북한이 통일된 상태에서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만약 남북한이 이 상태로 분열된다면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였죠.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이 생각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한만이라도 정국이 안정되기를 원했습니다. 거기에 이승만이 <정읍발언>이라는 유명한 사건을 일으켜 풍파를 일으킵니다.

 

이승만은 평소, <남한만이라도 빨리 정부를 수립해야 하므로, 38선 철폐와 자율적 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이죠.

 

그런데, 이승만이 말한 자율적 정부 수립이란, 만약 38선이 철폐되지 않으면 남조선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미국이 주장해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말합니다. 특히, 전북 정읍에서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해버립니다.

 

난리가 났죠. 김구는 <38선을 베고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통일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또 김규식은 이승만과 같은 극우파를 제외해 버린채, 우파와 좌파가 연합하여 남북한 통일을 추진하자는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합니다. 이로서 이승만은 왕따를 당하게 되죠.

 

그러나, 당시 미국은 소련을 적대시하는 봉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구, 김규식 보다는 이승만을지지하였습니다. 특히, 김구는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자는 통일정부 입장을 내세우는데, 이승만은 남한의 반절정부라도 세우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갈등은 큰 것이었습니다.

 

결국, 1948년 치루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총선에 김구와 다수 민족주의자들이 불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헌국회의 투표결과 이승만 의장, 신익희, 김동원 부의장이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헌법제정 후 이승만과 이시영이 대통령과 부통령이 된 것입니다.

 

대통령은 이승만이 되었지만, 이승만이 김구를 배척하면서 주장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은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 지울 수 없는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건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개국공신인 점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승만을 이렇게 최악의 인물로 질타하는 이유는?

 

그 이유는 하나 하나의 행적이 역사를 바꾸는 기로에 있는 대단한 인물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음에도, 하나같이 역사의 흐름을 백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이승만 하면 생각하는 것은 <자유당과 독재>입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인상깊게 남은 정책이 <북진통일>밖에 없습니다. 계속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 반대파는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친일파 청산 등의 특별법은 만드는 족족 폐기시키거나, 협박으로 사장시켜 버렸습니다. 토지 개혁은 철저하지 못하여 자원의 평등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선교 중심의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떠오르는 야당 대표 조봉암을 죽여 버리기도 했습니다. 북한 사주를 받은 자라고 하여 사형선고를 내렸죠. 

 

결국 이승만은 부정부패가 누적되어 3.15 부정선거 등의 이유로 국민들의 심판을 받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납니다.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지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을 버리고 먼저 도망쳤다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선장에 못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자칭보수 세력에서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승만'입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입니다. 

' 불과 46시간 만에 서울을 도망친 이승만' 

64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작전명 '폭풍'으로 한국에 대한 전면 남침을 시작했습니다. 

북한군이 남침하던 6월 25일 새벽 6시30분, 이승만은 서울 창덕궁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낚시하던 이승만에게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은 전쟁 발발 소식을 전합니다. 

 

 

 

전쟁소식을 듣고 난 이승만은 그로부터 46시간이 지난 6월 27일 새벽 4시 서울을 빠져나가는 특별열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피난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고, 그를 수행한 사람은 부인 프란체스카,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비서 황규면, 경호경찰 1명 등 모두 6명에 불과했습니다.

이승만의 피난이 얼마나 황당했느냐면 국무위원들조차 6월 27일 아침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해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서울을 빠져나간 이승만은 6월 27일 오전 11시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왔다는 (원래 국무회의와 국회 등에서는 서울사수 →수원 이전을 검토했기 때문에) 의견에 따라 12시 30분 열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갔습니다.
 
' 이승만은 서울 사수를 고집했었다?' 

일베나 자칭 보수 우익 사이트에서는 이승만이 서울을 사수하려고 했다면서 아래와 같은 글들이 돌아다닙니다.

 

 

 

6월 27일 새벽 2시 이승만이 이기붕과 신성모 국방장관, 조병옥 등의 권유에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주장했다는 이 글은 조금 어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승만이 경무대를 빠져나간 시간은 3시 30분 이전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1시간 30분 만에 서울사수를 고집했던 이승만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사실은 별로 신빙성이 없습니다.

 

 

 

주한 미국 대사 무초는 미국정부에 보낸 문서에서 북한군의 전면 남침 소식과 함께 6월 26일 이승만이 대전으로 정부 이전을 결정했다는 보고를 합니다.
 

전쟁이 발발한 지 하루만인 6월 26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겠다는 이승만의 결정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6월 25일 밤 9시 이승만은 무초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나 '내가 공산군 손에 들어가면 나라가 곤란하게 되니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초는 '잡히는 것은 안될 일이지만 잡히기 전까지는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승만은 이미 전쟁이 나는 날부터 본인 스스로 오로지 서울을 빠져나갈 생각만 했었던 것입니다. 

' 이승만의 6.27방송은 아나운서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6월 27일 대구에서 대전으로 올라온 뒤 밤 10시부터 특별방송을 합니다. "우리 국군이 공산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서울 시민과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승만의 6.27특별 방송을 놓고 본인은 대전에 있으면서 거짓으로 서울시민을 안심시켰다는 주장과 단순히 아나운서가 미리 방송을 틀어놓고 도망쳤다는 설이 있습니다. 

당시 녹음을 했던 아나운서의 말은 이런 주장과는 다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신이 방송국 책임자인가 하고 물었다. 방송 과장이었던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당시 6.25전날 대전방 송국장이 서울에 출장 가서 대전에 없었다)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직접 나에게 내렸다. 

1. 이 방에서는 절대로 나가서는 안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저녁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여 전 국민이 듣도록 하라. 
4. 누가 묻던지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5. 이 대통령이 방송한다고 미리 누설해서도 안 된다는 것 등 이었다. 
<출처:방우회, 납북국회의원유족회>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각자가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만, 실제 이승만이 대전에서 녹음하면서 서울시민을 안심시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인 6월 27일, 모든 신문들은 '국군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북상 중'이라는 오보(언론 조작)를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승만정권은 한국전쟁에 대해 처음부터 국민을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오히려 국민을 위험에 빠뜨렸던 이승만' 

한국전쟁이 발생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북한군은 미군이 남한에 없어서 충분히 남한을 함락시킬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남한에 병력과 장비,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을까요?

 

 

 

이승만은 평소에도 북진통일을 주장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의 허풍 때문이었습니다. 

"각하께서 명령만 내리면 언제라도 각오가 돼 있다. 점심은 개성에서 먹고, 저녁은 평양에서 먹고, 단 7일이면 북진통일을 완수할 수 있다"

매번 전쟁을 통해 북진통일을 이루겠다는 이승만정권에 대해 미국은 병력과 무기를 남한에 놓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미국은 이런 이승만정권의 무모한 북진통일론에 대해 만류를 하면서 전쟁을 하지 못하게 미군 병력과 무기를 철수시켰던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만 있었어도 한국전쟁이 났을 때 막을 수 있는 무기와 장비가 있었겠지만, 오히려 허풍과 무모한 반공정책으로 남한 국민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백년전쟁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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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뷰팅님의 댓글

  • 쓰레빠  뷰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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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대도 이승만을 국부어쩌고 저쩌고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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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에사르리님의 댓글

  • 쓰레빠  청산에사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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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가 되었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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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dentia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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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위너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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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kookie님의 댓글

  • 쓰레빠  mr.koo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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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관위 홈피에 이승만은 ‘독립운동’ 김구는 ‘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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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시호구경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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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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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퍽Q님의 댓글

  • 쓰레빠  무한퍽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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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쟁시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자 라디오에선 국군이 잘 싸우고 있단 방송 열심히 하게하고 지는 혼자 살겠다고 한강다리 끊고 도망
    그런데 국부라는 부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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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션님의 댓글

  • 쓰레빠  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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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탈자가 더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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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님의 댓글

  • 쓰레빠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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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인간인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더더욱 분노할만큼 싫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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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담론자님의 댓글

  • 쓰레빠  정사담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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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선생님과 이승만은 해방직후까지 두터운 관계였고 임정 내에 갈등도 김구선생님이 도와주고 했지만 뒤통수를 제대로 쳐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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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LMAN님의 댓글

  • 쓰레빠  ZA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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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 이익을 위해 자국민들을 학살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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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차님의 댓글

  • 쓰레빠  자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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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중앙정보부의 해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이승만은 사적권력을 추구하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 이라는 설명이 따르고 있다.
     
    이승만은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는 “한일합방 3년도 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의 느림보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며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고 나섰다.
     
    하와이에서 박용만장군의 무장독립투쟁에 반대했던 이승만은 한인학교를 운영하던 중 1916년 6월 10일자 미국신문(호놀룰루 스타 블라틴)에 “우리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인들은 나에 대해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글을 기고하여 자신이 항일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1918년 이승만은 독립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하다 독립군들에게 발각되자 독립군들을 ‘폭동예비위험인물’ 로몰아 미국 경찰에 고발한다. 하와이 (신한민보 1918년 2월27일)에 따르면 이승만은 재판장에게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 안에 한국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 운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입항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이것은 미‧일 간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두 나라 간 평화를 방해하려는 짓입니다. 저들을 의법 조처해 주십시오.” 라고 호소했다. 결국 애국자 박용만 장군은 미국에서 해외로 추방당했다.
     
    1919년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설립이 추진되자 이승만은 독립자금이나 독립군에 영향력이 컸던 기독교인들을 속여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고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 된 후, 재무부를 무력화 시키고 모든 독립자금을 자신의 손에 움켜쥔다.
     
    1920년 6월 미 수사관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을 체포한다. 체포‧기소한 이유가“백인 여성들을 유혹하여 데이트했으며 딸 같은 나이의 노디 양과의 합숙”이었다. 임시정부 대통령 임기기간 독립자금으로 어린처자들과 유흥을 즐긴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모금한 독립자금 중 13%만 임정으로 보내고 87%는 개인적으로 유용하였다. 3.1운동으로 수십만의 동포가 희생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1924년 이승만은 무장투쟁금지와 독립자금유용으로 결국 임정에서 탄핵 당한다. 이승만은 탄핵당한 보복으로 임정으로 가던 독립자금을 완전 차단하여 임정은 생사의 기로에 선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성공하자 이승만은 김구주석에게 “어리석은 짓 그만 하쇼. 독립운동에 전혀 도움이 안 되오.” 하며 일본인들처럼 비난했다.
     
    1941년 8월 8일 일본이 화와이를 침공하자 이승만은 동포들에게 “분투하라! 싸워라!우리가 피를 흘려야 한다.”며 무장투쟁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개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그리고 1945년 10월 이승만은 자신이 반공주의자임을 미국에 선전하며 맥아더를 만나기 위해 도쿄로 날아간다.
     
    그 후 이승만은 공산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의 대립을 이용해 미국을 등에 업고 험난한 통일정부 대신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하여 관철시킨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한다. 또한 미국이 원하는 대로 민족주의자 대신 매국노들과 손을 잡고 애국자들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한반도는 해방 후 70년째 분단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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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효력발생님의 댓글

  • 쓰레빠  공시효력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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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정교과서에는 이런 팩트가 실려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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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펀지님의 댓글

  • 쓰레빠  스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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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미국은 이승만을 지지, 소련은 김일성을 지지함..

    2.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나 둘다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 정치를 했다..

    3. 둘다 민족주의 우파를 철저하게 배격함..

    4. 과연 독립운동은 한건지 의심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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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doxx님의 댓글

  • 쓰레빠  parado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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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은 매국노 기회주의자였다고 알고 있는데 더 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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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춘법으로너의심경을흐뜨리겠다님의 댓글

  • 쓰레빠  맞춘법으로너의심경을흐뜨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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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하고 한국이 달랐던점은 북한은 친일파를 제거했고 한국은 경제를 이유로 살려두었죠. 그것도 두번씩이나 고려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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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밖은위험해님의 댓글

  • 쓰레빠  이불밖은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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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도 씹 버러지들이 저런이들을 지금의 기득권으로 만들어줘버렸고
    이젠 아예 손을 쓸수가 없다
    사실을 알고있는 이들은 빨갱이로몰아 처형해버리고
    자신들의 추악한 과거는 미화해서 포장해버린 이들
    그리고 그쉨히들을 지지해준 개쌍도 것들
    약산 김원봉 선생도 해방이후 노덕술에게 시달리시다
    월북하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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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닥따그닥님의 댓글

  • 쓰레빠  다그닥따그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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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 그 이상의 쓰X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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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DE님의 댓글

  • 쓰레빠  ABC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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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미국에게는 정말 필요한 아주 딱!인 인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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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하자쫌님의 댓글

  • 쓰레빠  적당히하자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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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짓거리로 대통령까지 ... 희대의 사기꾼보다 더한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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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san님의 댓글

  • 쓰레빠  woo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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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따 길기도 길다. 이전에 보았던 내용이고, 나도 분개했으나, 다른 주장도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미 정답을 정하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보만 왜곡해서 적은 글입니다.
     
    엘리트 교육을 받고, 미국 국적 받아 편하게 살면 되시는 분이 뭐하러 한국인 교육, 독립운동, 외교활동을
    하셨을까요?  한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때 한국 국적은 무국적, 그래서 일본인으로 적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법적으로 한국인은 당연히 일본인이므로) 한번 이동하실때 마다 고초를 왜 감수했을까요?
    가장 많은 독릭자금 획득본부를 관리하셨고, 이에 시기와 질투가 많아 투명한 자금 운용을 노력하고, 왜 돈관련 많은 증거와 기록을 남기는데 노력하셨을까요?
    지금에 시대상과 그때의 시대상이 다르고, 그 시대상에 적절한 방향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성공(?) 하신 분들의 다른 점을 배울려고 노력하시고, 성공한 사람들은 다 부정과 부패, 파렴치로 성공하였다고
    매도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잘못하신 점도 많을 것이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상한 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점만 보고 전체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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