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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論介)의 비화(秘話)]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 장군의 부인이다

  • 작성자: 걸더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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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1270
  • 2017.09.27

 

1) 최경회(崔慶會) : 그 유명한 논개(論介)의 남편으로 전해진다.
논개는 사실 기생이 아니고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남편이 진주에서 전사하자 기생을 가장, 왜장들의 승전축하연에 참석해 왜장을 안고 투신했다

전라남도 능주(綾州)(현 화순군)에서 해주 최씨 최천부(崔天符)의 아들로 태어났다. 벼슬은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에 이어 옥구, 장수, 무장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후처인 주논개는 장수현감을 할 때, 논개의 숙부가 민며느리로 팔아버린 것을 논개의 어머니가 다시 찾아온 송사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들 모녀가 거처할것이 없음을 말하자 관청에서 지내게 배려하였다. 이후 무장현감으로 임명될 때 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는 이어 영암군수와 영해,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 23년) 모친 평택임씨가 임종하여 상을 치우기 위해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인 화순으로 낙향하였다. 1592년 모친의 삼 년상 기간 중인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큰 형 경운(慶雲)과 둘째 형 경장(慶長)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한다. 그는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5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조카 최홍재로 하여금 고경명 장군의 휘하에 합류하여 싸우게 했다. 그러나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자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 등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금산과 무주에서 전주와 남원으로 진격하는 왜병과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우지치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진주로 집결하는 왜군을 방어함으로써 진주대첩을 가능하게 하였다. 최경회는 이 전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다.

1593년 경상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 주둔 중 6월 가토 기요마사 등이 다시 진주성를 공격해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과 분전했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결국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과 병사를 비롯하여 양민들까지 대부분 전사하였다.


2) 논개부인은 기녀(의녀) 인가?

논개는 임진왜란 때 큰 공적을 남긴 전북 장수 사람이다. 그러나 논개와 그녀의 가계, 생장과정, 그리고 신분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진주사람들도 그녀의 출생신분을 알지 못하고 죽었으니 단지 기녀로만 알고 있다.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어우당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헌에는 논개의 가계와 생장과정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많은 억측과 이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던 중 1700년대 초에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순절을 포양하도록 계청하였던 바, 조정에서는 그녀의 가족을 찾아 포상하라는 윤허가 있었다.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뛰워 사문했으나 논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포상하지 못했다. 그 뒤 꾸준히 논개 사적 조사가 진행되어 1700년대 중반부터 권적의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 최공의 시장”, “호남절의록”, “호남상강록”, “호남읍지”, “동감강목”, “일휴당실기“, ”매천야록“등의 문헌과 고노상전 200년의 구전설화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논개의 가계와 생장과정 등의 행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정리해보면

논개는 이름, 호는 의암, 성은 신안 朱(주자의 후손)씨이며,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논개는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시-1574.9.3밤)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아이의 사주를 짚어보고 계집애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뻐하였다.
이름을 논개라고 지은 것은 딸을 술시에 낳았으니까 개를 놓은 것과 같고, 거꾸로 읽으면 ‘놓은 개’, 즉 ‘논개’가 되므로 그렇게 이름 붙이면 역신도 시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다.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이었다.

논개 나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뜻하지 않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지할 곳 없던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숙부는 노름으로 돈을 탕진하고 이웃 마을에서 밥술깨나 먹고 사는 김풍헌에게 찾아가서 조카를 민며느리로 몰래 팔고 달아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논개 모녀는 부랴부랴 외가로 일시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제소로 장수 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재판관은 최경회 현감이었다. 최 현감이 자초지종을 캐보니 달아난 숙부 주달무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했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두 모녀를 최 현감은 내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도록 배려했다. 이런 운명적이 인연으로 최경회와 논개는 만나게 되고 최 현감집 식솔이 되었다. 논개는 잔심부름이 끝나는 대로 틈틈이 김씨 부인이 일러준 충효열의 뜻을 가슴 깊이 새겼다.

김씨부인이 죽을 때 유언으로 논개와 새로 결혼할 것을 남기었고 세월이 흘러서 논개 나이 17세가 되던 1590년 최경회가 담양부사로 재직할 때 두 사람은 부부의 예를 올렸다.

그 해에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를 고향 장수로 보냈다. 2년뒤 임진년(1592)에는 역사상 980여 회의 외침 중 가장 처참했다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상중인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옛날 현감을 지냈던 장수에 들러 의병을 모집하고 논개도 만났다. 실로 2년 만의 해후였다.

최 의병장이 월강리 앞 들판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킬 때 논개는 동네 부인들을 모아서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다.

최 의병장은 훈련된 500여 정예부대를 골자부대로 이름 짓고 무주 쪽으로 진격한 뒤 무주 우지치전투에서 첫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산음, 지례, 개령, 성주등 경상도 일대를 누비면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 데에는 최경회가 이끄는 호남 출신 의병들의 성 외곽에서의 맹활약이 크게 주효했던 것이다.

최경회는 그간의 의병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그 소식이 장수에 머물고 있던 논개에게도 들려왔다.
논개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한시 바삐 진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남복으로 변장을 하고 진주로 가는 도중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오랜만에 논개를 본 최 병사는 한없이 반가웠지만, 회포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10만이 넘는 왜군이 진주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동분서주해야 했던 것이다.

6월 19일, 드디어 왜군은 10만여 대군을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해왔다.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성은 아수라장으로 초토화됐다.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 진주성 3장사는 성이 함락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해 하직인사를 올린 후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했다.

한편 전투가 한창일 때 논개는 성안에서 수발을 열심히 들었지만, 성을 빠져나간 후일을 도모하라는 최 병사의 엄명에 성을 빠져나와 외진 곳에 은신하면서 전황을 살폈다.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 병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논개는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했다. 마침 칠월 칠석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진주 관기들을 불러놓고 전승 축하연회를 갖는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논개는 이때를 놓칠세라 마음에 다지면서 관기들 틈에 끼여 연회장까지 들어갈 요량으로 관기들이 촉석루에 들어가는 시간과 길목 등을 정확히 알아두었다.
그러고는 몸에 지니고 있던 금붙이로 여름옷 한 벌을 곱게 장만하고 가락지 등 필요한 물건도 구했다.

드디어 그 날이 왔고 논개는 관기처럼 곱게 단장하고 시간에 맞춰 길목에 서 있었다. 논개는 관기들이 촉석루를 향해 들어갈 때 뒤에서 천천히 따라 가다가 발길을 돌려 촉석루 아래 강가의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가면 정체가 탄로날 위험성이 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어 상대방을 유인해 보자는 계략이었다.

연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술에 취한 왜장들이 문득 강가의 바위 쪽을 내려다보았다. 웬 선녀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강가의 바위 끝에 서서 자기들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것이었다. 왜장들은 한눈에 반하여 금시라도 여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정체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돌연 육척장신의 체격이 장대한 왜장 하나가 논개쪽으로 다가가면서 자기에게로 오라며 소리쳤다. 논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면서 왜장을 유인했다. 왜장은 논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자기도 모르게 논개 앞으로 다가갔다.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가락지를 낀 팔을 벌려 기쁘게 맞이하면서 왜장을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논개가 살해한 왜장은 힘세고 용맹스럽기로 유명한 맹장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논개가 순절한 바위를 후인들이 의암이라 이름 짓고 논개와 동일시하여 호가 되었다.

이상이 위에서 논의된 문헌, 설화 등을 집약해서 구성한 의암 주논개의 일대기이다. 앞으로는 논개의 가계, 생장과정, 신분 등에 관해서는 더 이상 기녀(의녀)라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나아가 주자의 후손인 의암 朱논개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첫째로 제 몸을 불살라서 주변을 밝히는 인애정신,

둘째로 패권주의에 맞서 끝내 항거한 의용정신,

셋째로 사대부도 아닌 아녀자의 몸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지아비를 사랑한 충열정신은 만인의 귀감이 되는 바,

그 위대한 교훈을 세상에 널리 홍보하여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본받게 하는 것이다.

 


 <진주 촉석루와 신안 주씨 논개부인>

임진왜란때 왜장을 껴안고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한 의암 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부실이었습니다.
성은 신안 주씨이며
경상남도 장수군 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암이라는 호는 사후에 내겨진 것입니다.

최경희의 정실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최경희에게 자신이 죽은후 재색과 부덕을 겸비한
논개를 처로 맞아들일 것을 권유하였고
부인이 죽고난 후 몇 년이 흐른 후 논개는
최경회 현감과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울 때 논개는 낭자군을 조직하여
치마폭에 돌멩이를 나르고 가마솥에 물을 끓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에게 퍼붓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왜군이 성안으로 들이닥치자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모여 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결의하고는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합니다.

진주성문을 들어서면 촉석루 가기 전에
비석 하나가 외로이 서있습니다. 이 비석이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입니다.

矗石樓中三壯士
一杯笑指長江水
長江之水流滔滔
波不渴兮魂不死

촉석루위 마주 앉은 세 장사들은
한잔 술로 웃으면서 남강 물을 가리키네
남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않고 흘러가니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

성이 함락되기 전 다른 부녀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피신한 논개는 왜군들이 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서 진주의 수안이라는 기생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자신을 명단에 넣게 했습니다.

칠월 칠석날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연회에 참석해 왜장을 대취하게 만든뒤 춤을추며
연회장을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마디마디 가락지를 낀 손으로
왜장을 껴안고 강물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논개부인의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논개가 뛰어내린 바위를
의로운 바위라 하여 의암이라 이름짓고
논개와 동일시하여 그의 호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현감 정주석은 비석에 명문장을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나라가 침략을 받아서 어지러울 때
구차하게 살지 않음이 쉽지 않고
열사로도 어려운 바라.
일개 여자가 대의를 판별하고
죽는 것을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같이 보았으니
어찌 그리 빛나며 매울 쏘냐.
당일을 상상해 보면
위엄과 늠름한 기가 사무쳐 해와 별같이 빛나도다.
어찌 그리 장할소냐.
지금 여기에 의기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함으로써
평생 공경하는 마음으로 뒤쫓아 갈 것은
지체 낮은 사람들의 바람이라
삼가 글로써 기록하여 남기나이다.

변영로의 논개라는 명시도 있다.

왜적에 대한 민족적 분노와 민족애,국과 민족에 대한 애정

그리고 논개의 순국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민족과 역사의 영원성을 노래한 시이다.

<논개 - 변영로>

거룩한 분노(憤怒)는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그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로 알려진 논개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성은 주씨(朱氏)이다.

1593년(선조 26) 진주싸움에서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왜곡된 주장이 있으나 역사의 진실은 최경회의 부인이 사망한 후 얻은 2번째 부인이다.

1593년 6월 김천일(金千鎰)·최경회·황진·고종후(高從厚)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었고 일본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과 죽은 남편 최경회의 복수를 위해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에 기녀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이때부터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진주사람들은 논개의 출생신분을 알지 모르니 단지 위장된 기녀신분을 알고 지금까지 그녀를 기녀로만 알고있고 또한 알려져 있으니 참 안타까운 노릇이다.


 <논개사당 의암사義巖祀> 전북 장수군


 논개가 태어난 장수는 그녀를 더 애달프게 여기는 것 같다. 비록 사후지만 그녀를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사당을 지어놓고 남녀노소 사당에 올라 그녀를 추모한다. 그녀의 성처럼 붉은색의 사당이 의암호 주변에 우거진 나무의 초록빛과 대조돼 더욱 아름답다. 사당 꼭대기까지 오르려면 3층 높이의 계단을 타야 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의암호의 풍광이 수고스러움을 감내하게 만든다. 주씨 일가가 모여 살았던 주촌마을에는 아직도 논개 생가가 남아 있는데 너와를 척척 얹은 기와집이 오순도순 모여 있어 구경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사진] : 진주성내 정경, 촉석루, 의기사, 의암, 남강과 까치, 진주성내의 박물관, 그 내부에서 발견한 옛날사진 등 그리고 남강은 말없이 구비구비 잔잔하게 햇빛을 반사하며 무심히 흘러간다...


그녀에게는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義巖)이라는 호가 붙여졌고 그녀의 의로운 행동을 입으로 구전되어 진주시민들은 눈물로 추모했지만 논개는 언제나 기녀(의녀 또는 최경회장군의 첩)로만 평가절하되어 내려왔다. 그녀의 신분이 기녀가 아니고 최경회장군이 사별하고 두번째로 얻은 부인이라는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유교 사상 아래서 남편의 복수를 위해 기녀라는 신분을 위장하여 갖게 된 논개는 보수적인 지배계급에 의해 그 이후 기녀라는 편견의 대상이 되어 구전되다가 기녀에서 의녀란 신분으로 왜곡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니 정말 역사의 진실이 애닮지 아니할 수 없는 심정이다.
이제는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진주시에서도 논개의 잘못된 정보를 제대로 알려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14. 02. 15. 도담(필부) 주행연

 

** 양귀비보다 더 붉은 그 마음, “논개” 자고있는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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