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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례 대만해협 위기, 매번 미군 위력 과시에 해소…4차 위기는

  • Bl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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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0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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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news.naver.com/mnews/article/421/0006255057?sid=104


(서울=뉴스1) 김정률 기자 =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두고 중국이 군사적 대응 카드까지 꺼내들면서 26년만에 다시 '4차 대만해협' 위기가 촉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일고 있다.


중국은 대만을 핵심 이익으로 꼽으며 어떤 외세의 간섭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올가을 3연임을 앞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지난해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 대만 통일을 천명한 바 있다.


대만은 미·중에 있어 모두 전략적·지정학적으로 핵심 지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세계 군사·경제력 1위인 미국은 세계2위 경제대국 중국의 대양 진출을 막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항공모함' 격으로 대만이 필요하다. 반면 중국은 시진핑 체제 이후 더 넒은 바다로 진출을 위해 대만 통일이라는 역사적 숙원을 이룬다는 입장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대만 항상 미·중 사이에서 끼여 중국의 위협 속 풍전등화와 상황을 이어왔다. 이중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상황을 대만해협 1·2·3차 위기라고 부른다. 대만은 이때마다 미국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이제 커질대로 커진 중국은 과거의 중국과 현재의 중국은 다르다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어 펠로시 의장의 방문으로 촉발될 수 있는 4차 대만해협 위기는 더욱 위험하다는 분석이다.


중국 군항공 전문가인 푸첸샤오는 중국 환구시보 영문판 글로벌타임스에 "중국 군용기가 대만 주변을 정기적으로 순찰할 수 있다"며 "인민해방군(PLA)의 육해공군은 1996년 대만해협 위기 때보다 요격과 타격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고 했다.



◇1·2차 대만해협 위기

대만 문제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중국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 정부는 1949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대만으로 쫓겨났다. 당시만해도 대만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미국은 1950년 미국의 극동방위선인 애치슨 라인에서 대만을 제외했다.

하지만 한국 전쟁 발발 후 해리 투르먼 미국 대통령이 대만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등 대만에 대한 군사적 지원 의사를 드러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이런 미국의 의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1954년 3월 중국은 대만 진먼다오(금문도)를 포격하면서 1차 대만해협 위기가 촉발됐다. 당시 국민당 정부도 중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감행, 사태는 악화했다. 미국은 대만 붕괴를 막기 위해 대만해협에 해군력을 배치하면서 대치국면이 이어졌다. 다음해까지 이어진 1차 대만해협위기는 미군 제7함대가 나서면서 겨우 해제됐다.

1954년 1차 위기 이후 미국은 1955년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 주요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1958년 8월23일부터 10월5일까지 두 달 가까이 지속된 2차 대만해협 위기는 미국이 얼마나 대만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으로부터 47만 발의 포탄이 대만에 쏟아지자 미군은 군함과 전투기 등을 동원해 중국을 압박했다.

지난해 5월 뉴욕타임스(NYT)는 '펜타곤 페이퍼'를 언론에 유출한 대니얼 엘스버그가 복사해놓은 1966년 기밀 보고서를 인용, 미군 지도부가 2차 양안 위기 당시 중국 본토에 대한 선제 핵 타격을 강하게 요구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냉전시기에 미국은 주적 소련 견제의 필요성이 컸다. 이에 따라 미국과 대만의 수교는 197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핑퐁외교를 통해 '수교'를 맺으면서 끝이났다. 그동안 대만을 지켜주던 미-대만 상호방위조약 역시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하지만 미국은 1979년 국내법으로 '대만관계법'을 제정해 대만에서 무력 분쟁이 발생하면 이를 방어할 수 있도록 했지만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했다.

◇3차 대만해협 위기

1995~1996년 제3차 대만해협 위기는 중국군이 1995년 7월 21일부터 1996년 3월 23일까지 246일간 대만해협을 포함한 대만 근해에서 다수 미사일 시험발사로 발생했다.

1995년 중후반에 실시된 첫 번째 미사일 발사는 하나의 중국원칙을 외교적으로 반대하는 대만의 리덩후이 총통 정부에 대한 위협 메시지 격이었다.

리 총통은 1994년 미국에 가려했지만 중국의 공작으로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다. 이듬해 리 총통이 모교인 코넬대 강연을 위해 다시 미국 방문을 시도하자 미 의회에 차원에서 리 총통의 미국 방문을 허용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정부를 압박, 결국 리 총통은 미국을 방문했다.

1995년 초에 실시된 두 번째 미사일 발사는 1996년 대선을 앞둔 대만에 공포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은 같은해 7월21일에서 26일까지 대만 영유인 펑지아(逢甲)섬에서 불과 60㎞ 근해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푸젠 지역에 동원령을 내렸다. 1996년 3월8일 미 7함대 항모강습단 파견으로 위기가 고조되자, 미국 정부는 3월11일 홍해에 있는 니미츠(Nu항모 강습단을 추가 파견하기로 결정하면서 3월 23일 위기가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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