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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표가 방문한 소록도, 한센병 환우들의 식민지 아픔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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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7 13:03

 

 

 

전라남도 고흥군 녹동항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섬. 

 

어린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소록도입니다. 

 

거리는 가까워도 거친 물살 탓에 육지와 격리돼 있던 이 섬은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외부인들의 발길이 잦아졌습니다. 

 

중앙공원 입구 앞쪽의 빨간 벽돌 건물들은 감금실과 검시실. 

 

일제 강점기 시절 말을 듣지 않는다며 환자들을 강제로 가두고 체벌했던 곳입니다. 

 

시신을 해부했던 검시실의 한쪽 방에는 남성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했던 이른바 단종수술대가 남아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생으로 강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어마어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록도가 육지와 연결되면서 소록도를 찾는 방문객은 한해 30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단절의 공간에서 소통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는 소록도. 

 

하지만 잘못된 상식에서 비롯된 멸시와 차별은 소록도 한센인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올해 여든 살의 장인심 할머니. 

 

꽃다운 16살 이 섬에 들어온 뒤 어느새 60여 년이 흘렀습니다. 

 

21살 되던 해 이곳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뤘지만 아이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유전되는 병이 아니었지만 한센인 부부의 임신을 제한하는 규정 탓에 강제로 끌려가 낙태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소록도 곳곳엔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각종 차별의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소록대교 아래에 남아 있는 부서진 콘크리트 시설물. 

 

제비 선창이라 불린 이곳은 한센인들이 육지로 가는 배를 타는 곳이었습니다. 

 

육지와 더 가까운 소록도 선착장은 병원 직원 등 비한센인들 전용이었습니다. 

 

차별은 환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지난 1917년 한센병 치료를 위해 소록도에 처음 세워진 자혜의원. 

 

이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방치된 건물이 하나 나타납니다. 

 

콘크리트 더미만 남은 이곳은 결핵 환자를 따로 수용한 결핵 병동이었습니다. 

 

소록도 환자들 사이에서도 결핵에 걸린 사람을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차별했기 때문입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의사들이 쉬는 공휴일에 죽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숨진 사람의 시신은 곧바로 해부 실습용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픔의 소록도에 문재인 전 대표가 5.18 민주화운동 36주년을 맞아 16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광주와 전남을 찾았습니다. 

문 전 대표는 앞서 4.13 총선이 진행 되던 때 광주를 두 차례 방문했었고 이번에 총선이 끝난 뒤 처음으로 광주에 들른 것입니다.


 

 

지난달 18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의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뒤 지난 9∼10일 1박2일 일정으로 전북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이날 낮 고흥문화회관에서 열린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와 김혜심 교무에 대한 명예군민증 수여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마가렛 수녀와 마리안느 수녀는 20대의 나이에 유럽 '오스트리아' 국가에서 소록도병원으로 건너와 무려 43년이라는 기간동원 한센인 환자들을 돌본 수녀님들 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 전 대표가 오래전부터 감사인사를 하길 원했었다고 문 전 대표측이 말했습니다.

 

문재인 소록도 방문은 수여식이 끝난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개원 100주년을 맞는 소록도 병원과 치유의 길 등을 둘러보며 성당과 병원 관계자들을 만나 위로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는 소록도에서 1박을 한 뒤 이튿날인 오늘 17일 소록도 성당에서 진행될 미사에도 참석한다고 합니다.

 

문재인 전대표는 소록도 방문 일정을 당초 비공개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언론에 알려지자 밝힌 것이라고 하네요

 

한편 국민의 당 안철수 전 대표도 18일 5·18 기념 행사 후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행사에 참석 한센인들과 만날 예정입니다.

 

 

 

 

다시 소록도 이야기로 돌아와서....

 

인권유린과 식민지 근대의 살아있는 흔적, 소록도..

 

오랫동안 금단의 땅으로 인식되어왔던 소록도, 

 

하느님의 형벌이라고 했던 한센병 환자들이 멸시와 고통 속에 살아왔던 소록도에는 지난 한 세기 인류의 과오와 일제 식민지의 치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연륙교가 개통되고, 인근에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이 개관되면서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근대유산이 집중되어 있는 관광명소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죠.

 

 

 

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반도 남쪽 끝의 녹동으로부터 약 500m 거리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면적은 3.79㎢에 불과하지만 해안선길이는 12㎞에 이른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 부릅니다. 

 

소록도는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1910년 세운 근대적인 시립나병요양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수용하기 위한 수용 시설로 사용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되었죠.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4대 원장 슈호 마사토가 환자 처우에 불만을 품은 환자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가혹한 학대를 당하였으며, 강제 노동과 일본식 생활 강요, 불임 시술 등의 인권 침해를 당했습니다.

 

소록도는 섬의 전체가 국유지로 일반적인 주민은 거주하지 않으며 대부분 섬 주민은 국립 소록도 병원의 직원 및 이미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로서 희망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소록도 안에는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록도 감금실과 검시실,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납골당 등

 

일제 강점기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 건물과 흔적 등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중 1건이 문화재 자료, 11건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정관 수술과 시체 해부를 했던 검시실 앞에는 25세 젊은 나이에 강제로 정관수술을 받은 한 한센병 환자의 애절한 시가 남아 있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은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 "

 

 

 

섬에는 이외에도 환자들이 쉴 새 없이 벽돌을 찍어 내던 공장 터, 환자들의 강제노동으로 지어진 등대, 묵은 식량을 보관하였던 해변의 식량창고, 구순천교도소 소록지소, 학교 건물, 

 

나병에 감염된 부모와 미감아를 분리 수용해 놓고 한 달에 단 한 번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부모와 자식들이 면회했던 장소- 수탄장愁嘆場 등이 황폐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아픈 과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센병은 낫는다"는 글귀가 새겨진 구라탑,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비, 소록도의 역사와 환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 전시관, 

 

한국전쟁 때 이곳을 지키다 순직한 사람들의 영혼을 기리는 순록탑, 그리고 육영수 여사의 공덕비 등이 있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예전 기사입니다. 가슴 아파서 읽어보시면 어떨까해서 가져왔습니다. (출처 첫번째)

 

 

해와 하늘빛이 / 문둥이는 서러워 / 보리밭에 달이 뜨면 / 애기 하나 먹고 /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1936년)

이 시에서 문둥이는 아이를 먹는다. 천형(天刑)과 같았던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다.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 즉 한센병을 하나의 생명을 바쳐야 나을 수 있는 하늘의 형벌로 생각했다. 아이들이 한센병 환자를 호랑이만큼이나 무서워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끄집어 먹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두려운 한센병 환자 

한센병 환자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외모에서부터 왔다. 한센병에 걸리면 눈썹이 빠지고 피부가 문드러지고 농즙이 흘렀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까지도 한센병 환자를 꺼리고 멀리하였다. 그들은 완전히 버림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치료의 가능성이 희박한데다 주위의 버림까지 받은 한센병 환자는 자살을 시도하곤 했다. 

식민지 시대에는 대체로 1만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구걸이었다. 거리를 방황하며 구걸을 하는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왔다. 전염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은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동네에 들어오려는 환자들은 주민들에게 집단적으로 구타당했다. 

한센병에 대한 관심  

▲ 에비슨이 촬영한 나병 환자(1900년대 초). ⓒ동은의학박물관


환자들에게 따뜻한 손을 처음 내민 이들은 의료 선교사였다. 1909년 미국 북장로회는 부산에 한국 최초의 수용소를 설립하였다. 수용소는 대구, 광주로 늘어났다. 환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대상이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를 하느님은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자들은 내세에서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의료 선교는 국가가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환자들에게 파고 들어갔다.

일제도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공중 위생이나 치안의 측면에서 한센병 환자들은 위험했다. 나아가 환자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은 '문명국' 일본에 걸맞지 않았다. 그들에 따르면, 서양 문명국에서 한센병 환자는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었다. 오직 러시아나 발칸반도에 소수의 환자가 있을 뿐이었다. 한센병은 문명의 걸림돌이자 "국가의 치욕"이었다.

소록도 자혜의원의 설립 

1916년 일제는 10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소록도 자혜의원이었다. 일본 황실에서 제공한 임시 은사금(恩賜金)이 재원이었다. 수용 인원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각 도(道)에 환자의 수가 배당되었다.

부양을 받을 길이 없어 거리를 배회하는 중증 환자들이 첫 번째 수용 대상이었다. 환자 수용은 용이하지 않았다. 소록도에 송치가 결정된 환자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불안감이 심해지면 수송 도중 바다로 뛰어들었다.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생활  

▲ 광주의 나환자촌. ⓒ동은의학박물관


소록도 자혜의원은 경증(輕症) 환자를 수용하는 보통 병사, 중증(重症)과 부자유한 환자를 수용하는 중증 병사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증 환자 1인에 대해 1인의 경증 환자, 부자유한 환자 2~3인에 대해 경증 환자 1인이 함께 하였다. 경증 환자들은 다른 환자들을 간호하였다. 모범 환자에게는 '작업 조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들은 각종 작업을 지도하거나 병사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맡았다. 

환자들의 하루 일과는 오전 치료 시간, 오후 작업 시간으로 나뉘었다. 노동을 할 수 있는 환자는 노동에 종사했다. 야채의 경우 환자가 직접 재배하여 자급자족을 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환자 중 학식이 있는 사람은 강사가 되어 다른 환자들을 가르쳤다. 종교 시설로 예배당이 세워졌다. 소록도는 일종의 공동체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확장되는 지상 낙원? 

소록도 자혜의원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수용 인원은 1923년 25명, 1925년 125명, 1928년 200명, 1929년 300명, 1932년 20명씩 증가되어나갔다. 병원의 대규모 확장은 1932년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 해에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가 설립되었다. 협회의 설립 목적은 병원 확장에 있었다. 

협회의 기부로 소록도의 민간 소유지가 모두 구입되었다. 확장 공사가 이어졌다. 1934년 2000명, 1935년 1000명, 1937년 1000명, 1939년 1000명의 정원이 증가되었다. 1941년 소록도는 577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 있던 환자의 반 수 가까이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일제의 표현에 따르면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이상적 낙원"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 소록도 자혜병원 가동병사(假東病舍). ⓒ동은의학박물관


확장 공사와 환자의 고통 

그러나 확장 공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사에는 환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벽돌 제조, 자재 하역, 골재 운반, 도로 개설, 도배 등을 담당하였다.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환자들은 열의에 차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 그들은 강제로 이루어지는 노동에 지쳐갔다. 나중에는 분노했다. 

1941년 수용 환자 중 한 명이 특수 공로자로 표창까지 받은 환자 대표를 살해했다. 개원 이래 처음 발생한 살인 사건이었다. 살해 동기는 "6000 환우(患友)의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살해자는 피살자가 "상관에게 붙어 환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그로 인해 죽어간 환자가 수도 없이 많았다"고 밝혔다. 

1942년에는 원장이 수용 환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역시 환자에 대한 대우가 심하다는 이유였다. 살해자는 "너는 환자에게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라고 외치며 원장을 찔렀다. 그는 수용소의 부정을 폭로하여 환자에 대한 처우 개선을 도모할 계획도 있었음을 밝혔다. 소록도의 확장이 곧 환자의 복리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한센병은 범죄?  

▲ 조선나예방협회의 영수증. ⓒ동은의학박물관


확장 공사가 진행되던 1935년 조선나예방령(朝鮮癩豫防令)이 제정되었다. 핵심은 "예방상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나환자를 조선총독부 나요양소에 입소시킬 수 있다"는데 있었다. 강제 격리가 법률적으로 확정된 것이었다. 이제 한센병은 일종의 범죄였다. 범죄자가 형무소에 감금되듯이 한센병 환자는 강제로 소록도에 이송되었다.

범죄를 저지른 한센병 환자에 대한 조치도 취해졌다. 같은 한센병 환자들도 범죄를 저지른 환자들은 싫어했다. 형무소에 수감된 일반 범죄자들은 한센병 환자를 터부시했다. 전염의 우려도 있었다. 일제는 1935년 소록도에 별도의 형무소를 완공하였다. 일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로 이송되었다. 형기를 마쳤다고 소록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요양소에 수용되었다.

한센병 환자와 단종  

▲ 조선나예방협회의 감사장. ⓒ동은의학박물관


한센병에 대한 격리는 환자들에 대한 단종(斷種)으로 나아갔다. 소록도 자혜의원은 개원 이래 남녀별거제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설비 확장으로 부부 환자의 수가 증가하자 1936년부터 부부의 동거를 허용하였다. 다만, 일정한 조건을 갖출 경우에 한정했다. 예를 들면, 호적상 부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하여 곧장 동거가 허용되지는 않았다. 더 큰 조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단종이었다. 한센병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방법은 거세 이외에는 없다는 주장이 학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다. 

나쁜 인자를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정신병자 역시 단종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우생학이 유행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단종은 범위를 넓혀갔다. 도망가다 잡히거나 잘못으로 감금실에 갇힌 환자들도 단종 수술을 받았다. 한센병은 씨를 말려야 할 대상이었다.

강제 격리와 한센병 

다시 처음 시로 돌아가자. 시에서 문둥이는 하늘과 해를 피하는 존재였다. 해가 지고 달이 떠야만 세상에 나오는 존재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격리된 존재였다. 한센병은 그들을 세상에서 격리시켰다. 한센병의 역사는 세상이 전염병을 어떻게 격리해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한센병의 역사는 그 병이 필요 이상으로 격리되어왔음을 보여준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강제 격리가 사라진 것은 1963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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