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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너무 왜곡된 유럽역사의 여인들(메리 여왕, 마리 앙트와네트)

  • x슈나이티x
  • 조회 130323
  • 2016.10.20 07:50

 



 

 

 

 

1. 헨리8세의 딸인 앤 메리 여왕 (메리 1세)

 

 

[우리는 ‘메리(Mary)'란 여왕이름에 익숙해 있다. 메리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인 고로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라고 숭배하는 카톨릭 여왕에게 많이 붙는 이름이다.


우리는 ‘블러디 메리’라고 신교를 엄청 핍박하여 무자비하게 신교도들에게 피의 숙청을 감행한 잉들랜드의 메리 여왕을 기억하고 있다. 이 메리 여왕은 어머니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해 캐톨릭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영국교회를 탄생시킨 헨리 8세의 첫째 딸이다. 캐서린 왕비는 캐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의 공주였다.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볼린과 눈이 맞은 헨리 8세가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핑계를 잡아 이혼을 하려 했지만 교황청이 말을 들어먹지 않자 이혼을 감행하고 영국국교회를 탄생시켰으니 캐톨릭 측에선 헨리 8세가 반역자인 셈이다.


아무튼 이후 메리여왕은 스코들랜드 국민들에게 ‘불륜죄’로 찍혔다.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목숨을 연명하고자 잉글랜드로 도망을 가서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제 발로 들어선 죽음의 길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를 보자마자 칼라일 성에 감금시켜 버렸다. 혹시 스코틀랜드의 반역세력과 연대해서 자기의 왕위를 넘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무려 18년 동안이나 메리 스튜어트를 유폐시킨 것이다. 아무리 권력이 무섭기로서니 언니뻘인 메리 스코틀랜드 여왕을 그렇게 오랜 동안 가둬 뒀다가 목을 잘라 참수시키다니 . . . 메리 여왕은 캐톨릭을 상징하는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노스햄프튼셔의 사형장에서 비극적인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평가는 "술수에 능한 요녀, 악녀"와 "종교 분쟁과 왕위 갈등의 희생자"라는 평으로 갈리는데, 전자는 그녀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은 성공회 교도들과 잉글랜드의 일반적 평가고, 후자는 최근에 점점 조명을 받는 시각. 본토인 스코틀랜드에서도 평가가 좋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프랑스에서 자란 사람이라 당시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엄숙하고 우상을 배격했으며, 소박하고 근엄한 문화였던 현지 민심에 어긋나게 휘황찬란하고 우아한 프랑스 문화를 고집했으며, 현지에 연줄도 없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어설프게 국왕 행세 하려고 했다가 나라를 열강 사이 국제전에 휘둘리게 한 뒤 신하들에게 쫒겨났기 때문이다. 종교적, 정치적으로도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을 추구했던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왕권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약했고 이에 따라 유력 귀족, 도시민, 성직자들의 과두정 중심 정치 체제를 가졌으며,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매파에 속했던 장로교 엘리트와 정면 충돌했기 때문에 존 녹스, 조지 뷰캐넌, 엔드류 멜빌 등 당대 개혁가, 문필가들에게 두고 두고 까였다.


이러다가 현대 들어서 비운의 절세 미녀 여군주로 다시 재조명 받으면서 각종 영화, 티비쇼 등에서 다시 재조명 받게 되었는데, 이건 또 나름대로 역사학자들 사이에 비운의 미녀 여왕이고 나발이고 애초에 알맹이는 생판 외국인인 주제에 분별력도 없어서 당연히 쫒겨난 걸 드라마틱한 면만 보고 관광객 용으로 미화시키고 있다라는 식으로 까이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는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종교 개혁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고유의 개신교 교파인 장로회의 큰 기틀이 마련되고, 중세 후기 부터 지속 된 귀족, 도시민, 성직자의 삼각 과두정 체제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박은 매우 중요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사실 군주로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메리의 드라마틱한 개인적인 삶, 여성성만 두고 계속 떠들면서 정작 중요한 사건, 인물들은 무시 당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일명 블러드 메리라고 불리며, 실제로 튜더왕가 시절에는 악녀라고 불리웠던 것은 맞음

 

그런데 이 악녀로 불리우는 기준이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이유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걸 그 근거로 삼는데,

 

현실은 실제 통계를 내보면

 

튜더 왕가의 종교 분쟁이 시작되는 헨리8세부터 시작해서, 엔 메리, 엘리자베스 1세 이 순서대로 재위가 이어졌는데

 

엔 메리 여왕때가 오히려 종교적인 문제로 죽은 사람이 현저하게 적음.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국교회 신자이고, 엔 메리 여왕은 카톨릭 교도임. 

 

그리고 카톨릭 신자인 앤 메리 여왕이 재위에 오른 시점은 

 

튜더왕가뿐만이 아니라 영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선왕 헨리 8세가 

 

이미 영국의 절반 이상을 영국 국교회로 강제 개종 시킨 시점이고 (이 시점에서 흘린 피가 압도적으로 많음)

 

헨리8세 말년에는 더 이상 카톨릭 교도들을 잡아 족치기보단 어느정도 포섭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내세운 왕이 바로 메리 1세임.

 

 

이런 정치적인 이유로 재위에 오른 왕이 사람들을 종교적인 이유로 마구 잡아 죽인다? 메리 1세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어림도 없는 소리일 뿐더러 

 

그럴 권력이 있었으면 반란의 위험이 있는 배다른 동생 엘리자베스 1세부터 당장 잡아 족쳤을거임.

 

오히려 메리 여왕은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관대했고 종교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저 시기에 가장 적었다는게 정설임.

 

오히려 엘리자베스 1세가 더 독하면 독한 년인게

 

자신이 카톨릭 교도들을 잡아 죽이는걸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사까지 왜곡 시켰고(앤이 영국 국교회 신도를 잡아 족쳤으니까, 나도 카톨릭 교도들을 잡아 족치겠다. 뭐 이런 식으로...) 지 언니를 천하의 개썅년으로 만듬. 

 

하긴 앞에선 신사인 척 점잖게 굴다가 뒤에서는 사략선을 만들어서 통수나 치는 해적질이나 일삼던 국가의 수장이니 오죽할까

 

블러드 메리라는 단어도 엘리자베스 1세가 역사책을 뜯어 고치고 나서부터 나온 단어.

 

 

 

 

 

 

 

2.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트와네트

 

 

[1. 그녀는 정말로 프랑스를 말아먹은 원흉인가? - 정답은 no. 그녀가 왕비가 된 후 어느 정도의 사치를 부렸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전체 예 산 중 대략 3%가 왕실 관련 예산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예산의 10%도 쓰지 않았다. 당시의 프랑스 왕 정의 전체적 액수에 비해 발톱의 때만큼도 못한 액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쓴 돈은 다른 프랑스 역대 왕비들이 사치와 유흥, 도박에 썼던 돈에 비 하면 새발의 피라는 것이다!!! 


2. 그럼 왜 지금처럼 사치와 무개념의 대명사로 불리며 욕을 먹을까? - 문제는 당시 프랑스의 재정이 이미 최악이었다는 거... 당시 프랑스가 처해있던 상황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참패 + 미국의 독립에 무리한 자금 지원 + 세금징수권은 국가가 아닌 징수세금업자들에 게 넘어가버린 상태 = 국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ㅠ.ㅠ 게다가 그 상황에서 기근까지 들었으니...... 나라경제가 잘 돌아갈 리가 없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 배경은 민중들에겐 알바가 아니었고, 당장 화려한 왕실로 분노가 집중되었다. 그런데 루 이 16세의 경우는 사치는 커녕 품위 유지도 아슬아슬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화려한 왕비에게 집중포화가 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 정말로 "빵이 없으면 케잌(or고기or과자)를 먹으면 되잖아."라는 망언을 했나? - 전혀;;;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전혀 없다. 원래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나오는 말을, 오스트리아년이라며 그녀를 까대던 사람들이 이걸로 유언비어 를 만들어 터뜨렸고, 이것이 다시 혁명단에 의해 강도가 불어나면서 황당한 명언으로 불어나 버린 것....지 못미ㅠ.ㅠ 


4. 그 외에 마리 앙투와네트가 미움을 받은 원인은? -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와는 사이가 나쁜 오스트리아 출신이었고, 사람들은 그걸 트집잡아서 그녀가 오 스트리아의 첩자라는 의심을 가졌다. 물론 그런 오해가 없었어도 그녀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사실 자체로 도 그들은 못마땅해했다. 원래 프랑스 왕조에서 왕비는 '골방에 쳐박혀서 아기나 낳는 기계' 취급을 받았고, 왕들은 이런 왕비를 내쳐 두고 수많은 첩실들을 두었다. 그런데 루이16세는 앙투와네트 외에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아서 첩 실이란 없었으니...이로 인해 루이 16세의 이미지는 황당하게도 '성불구,고자'처럼 변했고,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앙투와네트는 남편 기를 다 죽여놓은 나쁜 년"이라며 뒷다마를 깠다. -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입닥치고 조용히 애나 낳는 게 미덕이었던 역대 프랑스 왕비들과는 달리, 앙투와네 트는 굉장히 활동적이었고 궁정활동의 중심이나 다름없었다. 서양 복식사에서 그녀가 남긴 업적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결국 이것 때문에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고 함부로 나댄다며 뒤에서 두고두고 까였다. -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하여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사건. 앙투와네트는 이 사 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오히려 앙투와네트에게 라모트 백작부인이 이용당했다 고 오해하고 말았다. -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루이 16세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앙투아네트의 책임은 아니다.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흥에 빠진 원인이라 는 설도 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앙투아네트는 사치도 그만두었고 왕비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여 왕실에 대한 지지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혁명정부는 원래 그딴 거 모른다.


5. 그녀의 죽음 그녀의 사형을 결정한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온갖 혐의가 걸렸다. 재정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 트리아와의 결탁,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들과의 근친 상간이라는 혐의가 걸렸다. 사실 모든 혐의에 대한 물증은 전혀 없었 다. 사형은 기정 사실이었고 재판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정의를 자청하는 혁명 정부로서는 아무런 증 거 없이 사형을 선고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은 혐의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세뇌된 아들 루이 17세가 '어머니에게 겁탈당했다는 거짓증언 을 하고 말았다. (왜 루이 17세가 그런 증언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맨 아래 참조) 그녀는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근친상간으로 처형될 당시 그녀의 유언은, 실수로 사형 집행자의 발을 밟고서 남긴 '죄송합니다, 무슈. 일부 러 그런 건 아니에요'. 이렇게 의연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이 사형에 대해 정치적인 사형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 다. (그런데 어째 세간에는 이 유언마저 '좀 있으면 죽을 마당에 그런 사소한 일이나 신경쓰는 병신 인증'이 란 식으로 퍼져 있다. 뭐지...)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 혀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는 파리의 생 드니 성당에 남편, 그리고 아들의 심장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이 그녀를 어찌나 증오했던지 단두대에 엎드리게 하지 않고 바로 눕혀서(그러 니까,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오는 모습이 그녀에게 똑똑히 보이도록)사형을 집행했다는 설도 있다. 


6. 그럼 마리 앙투와네트의 업적은?? - 실제로는 발랄하고 순진하고 동정심 많은 성격이었다. 사교적이었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사근 했으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편견없이 사람을 대했다. 실제로 루이 16세가 사냥을 하다가 실수로 농민을 다치게 하자, 직접 달려가서 그를 간호해주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때 서양 사람들은 구황식물인 감자를 "악마의 음식"으로 오해하고 피했을 때였는데, 마리 앙투와네 트는 감자에 대한 오해를 없애 농민들의 굶주림을 줄이고자 직접 자신의 모자에 감자꽃을 장식용으로 꽂고 다닌 적도 있다. 게다가 프랑스 왕비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빈민 구제에 관심이 많았었다고....ㅠ.ㅠ 


7. 최후의 편지 이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 전날,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밤을 새서 쓴 마지막 편지이다. 하지 만 이 편지는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전해지지 못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사후 반세기가 넘어서야 공개되었다. - "사랑하는 시누,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지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선고입니다. 그 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과 마찬가지로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중략)....훗날 을 경계하기 위해서 되풀이하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중략).... 당신에게 이제 나의 최후의 생각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 도 없었거니와 재판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통에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로마-가톨릭의 사도적인 신앙을 품고 죽습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해왔고 내가 잘 아는 조상들의 신앙입 니다.나는 내게 고통을 주었던 나의 모든 적들의 죄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형제, 자매에게 안녕 을 고하려고 합니다. 내게는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 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 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이라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다정한 시누.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을 온 마 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제는 종교적 인 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사제 한 사람을 임의 로 데려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전혀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여기서 편지는 중간에 끊겼다. 형리가 그녀를 데리러 왔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식들과 엘리자베 트가 살아남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인 루이 17세는 어린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딸인 마리 테 레즈 샤를롯은 평생 프랑스 혁명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마담 엘리자베트 또한 이 편지를 받지 못하 고 단두대에 올랐다. 여러모로 비극적인, 하지만 죽음 직전의 인간이 남긴 감동적인 편지이다. 


참고: 왜 루이 17세는 어머니를 근친상간범으로 몰아세웠는가? 몇 가지 가설이 대두된 바 있는데,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는 바로 루이 17세의 성격과 당시 정황.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의 성격에 대해 '주변의 부추김이나 자신의 상상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을 지녔다'고 기록한 바 있는데, 왕실이나 귀족 계층에서 태어난 남자아 이들에게서는 흔하게 나타나는 성격이었지만 이러한 성격은 어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파멸로 몰아갔다. 재판 과정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을 선고할 만한 결정적인 물증이 없자, 혁명가들은 가장 어린 루이 샤를을 꼬드겨 근친상간을 했다고 말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루이 샤를이 빗자루를 타고 놀다가 고환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인 왕비와 고모인 엘리자베스 공 주가 이 상처를 돌봐준 적이 있었고, 또 보다 어렸을 때의 루이 샤를이 자신의 생식기를 자꾸 만지고 건드리 는 장난을 치자 이를 마리 앙투아네트가 저지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기억을 토대로 혁명가들은 샤를을 부추 겨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고 말하도록 했다. 오히려 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7살의 남자아이였 기에 이런 괴랄한 증언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마약까지 동원해서 말 그대로 세뇌를 시켰다고 한 다. 유폐된 도중에도 혁명가를 불러제꼈다고.]

 

 

 

 

먼나라 이웃나라 저자 이원복이가 천하의 개썅뇬으로 만든 여자.

 

대표적인 어록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실제 이 어록의 출처는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Brioche: 프랑스의 과자 종류)을 먹으라는 말이었고", 이것도 사실 프랑스 혁명정부가 원래는 굶주린 아이들에게 가지고 있던 Brioche를 건네주라는 마리의 말을 왜곡시킨거.

 

향락과 사치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프랑스 왕실은 사치를 부릴래도 부릴 돈이 없었음.

 

선왕 루이 14세부터 이르던 사치는 "마담 뒤봐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루이 15세에서 절정에 달하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프랑스는 주제도 맞지않게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국고가 파탄난 상황이었음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프랑스 국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국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을 왕비로 들였으니

 

더더욱 지원같은건 없었고 실제로 마리 앙트와네트는 반강제적으로 부르봉 왕가 역사상 가장 소박한 생활을 보낼 수 밖에 없었음. 

 

나중에는 이런 상황이 몸에 베여서 사실상 은퇴한 귀족이 지내던 전원생활 비스무리한 일상을 살았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감자임.

 

당시 감자는 악마의 음식이라 불리며 (아무래도 싹이난 감자는 독성이 많다보니) 기피하는 작물이었는데, 

 

당시 나라꼴이 개판 5분전 상황이었으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감자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고 사람들에게 구황작물인 감자를 먹이려고 노력한 인물이 바로 파르망티에와 마리 앙트와네트

 

물론 이마저도 나중에는 프랑스 혁명정부가 훗날 평가절하하기 위해 외국인 여자가 악마의 과일(프랑스어로 감자는 Pomme de terre임. 직역하면 땅에서 나는 사과이고 당시에는 과일로 분류)을 먹인다며 오히려 프랑스 국민들을 자극하게 하는 소재가 됨.

 

나중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프랑스 혁명정부가 마리의 죄를 추궁하기 위해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털어도 나오는게 없으니까 최종적으로는 죄를 만들어서 단두대에 올렸는데, 

 

그게 바로 마리 앙트와네트의 어린 아들에게 약을 먹여서 근친상간에 대한 증언을 억지로 만든 뒤에 일어난 일

 

암튼 불쌍한 여자인데 

 

이원복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악녀 취급받는거 불쌍.

 

 

 

 

마리앙투와네트 :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게하면 되잖아~!

- 프랑스 국민들이 먹을빵이 없어 굶주림에 고통받는 말을 듣고

마리앙투와네트가 했다고 알려짐 ->>>>사실무근

- 사실 저말은 장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나오는 말임

 

마리앙투와네트 : 프랑스 국가예산의 3%(왕실예산의 1/10) 사용(다른 왕비들에 비하면 오히려 적은수준)

 

마리앙투와네트 : 무개념과 바게트된장녀의 대명사가 됨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당신의 오빠(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확고부동함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겁니다.”

시누이(남편 루이 16세의 동생)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논개에 비견될 정도로 완벽히 거품 낀 상태로 포장된 민비와 달리 죽음 앞에 당당하고 끝까지

기품을 지킨것은 오히려 앙투와네트였음

소 사치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나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으며

다른 왕비들에 비하면 오히려 양호한 수준이었음

- 지혜롭고 훌륭한 왕비는 분명 아니었지만 기요틴에 목이 날아갈 정도의

잘못을 했던 왕비는 분명 아니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음

 


 

<이 칼럼 및 기사는 커뮤니티 쓰레빠닷컴에서 선정된 회원들이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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