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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형제복지원.. 저는 83-2825입니다.

  • makenewss
  • 조회 29516
  • 2015.07.2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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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형제복지원 사건(釜山 兄弟福祉院 事件)은 3146명 수용 가능한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 372) 일대에 국내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1987년 3월 22일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이에 35명이 탈출함으로써 그 내부에서 일어난 인권유린이 드러나게 된 사건이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 그리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선 게 이 사건의 배경이었다.

 

형제복지원 폐쇄 이후,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려졌지만, 이후 빠르게 잊혀졌다. 27년 뒤, 1984년 입소하여, 1987년 폐쇄당시 전원조치된 피해자인 한종선이 2012년 5월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통해 세상에 알리고, 전규찬과의 공저 <살아남은 아이>(한종선, 전규찬, 박래군)의 책을 통해 형제복지원에서의 실상을 글과 그림으로 증언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 대책위원회,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이 결성되었다. 2014년 3월 2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형제복지원의 진실'에서는 27년 간 감춰져 온 이 사건의 의혹과 진실이 방영되었는데, 이 복지원에서는 수용자들의 중노동은 물론 수용자들에 대한 구타와 감금 그리고 성폭행까지 자행됐으며, 12년 동안 5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위치한 <부산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를 목적으로 해마다 20억 원씩 국고의 지원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부산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이나 노숙자, 기차역에서 TV를 보고 있는 무고한 시민 등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 시키고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 하거나 심지어는 죽이고 암매장까지 했다. 죄 없는 사람도 강제적으로 잡아간 까닭은 인원수만큼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12년 동안 무려 551명이 사망했고,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또한 원장 박인근(당시 58세)은 자신의 땅에 운전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했고,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시켰다.

 

이 사건 담당 검사는 김용원이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과 직원 주영은(당시 48세) 등 5명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 진행 과정에서 낙후된 대한민국 내 복지시설의 수준과 참상을 보여줬다. 이후 <부산 형제복지원>은 없어지고 그 지역에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 사건을 수사하던 김용원 검사는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이었던 박희태에게 사건 축소 및 외압 등의 지시를 받았다. 원장 박인근은 횡령죄 등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뿐 불법구금, 폭행, 살인 등에 대해서는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원장이 횡령한 국고보조금이 12억 원에 이르지만 검찰은 7억에 대해서만 기소하였다. 그는 항소심을 거쳐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히틀러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 곧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결국,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 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 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5년 4월 30일 절망한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권총으로 자살하게 된다. 향년 57세였다.

 

카다피

카다피가 사망할 당시 상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결국 리비아 시민군에게 체포당하던 중 한 시민군이 쏜 총상으로 인해 사망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향년 70세.

 

무솔리니

처형 기록에는 무솔리니의 총살을 지휘한 사람이 "발레리오 대령"이라 되어있다. 발레리오 대령의 실명은 왈테르 아우디시오이었으며 무솔리니를 처형한 후 이 사실을 《전국 민주 평의회》에 통지하였다. 처형 당일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가 구금되어 있는 집으로 가서 "나는 당신을 구하러 왔다.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나?"라고 말하며 무솔리니를 안심시킨 뒤 차에 태워 마을 교외로 데리고 나갔다. 아우디시오는 으슥한 곳에서 무솔리니에게 "내려"라고 명령했다. 무솔리니와 페타치는 서로를 끌어안고 공터에 서있었다. 아우디시오는 먼저 페타치를 쏘았다. 페타치가 쓰러지자 무솔리니는 재킷을 열고 "가슴에 쏴라"라고 말했으며 아우디시오는 무솔리니의 가슴을 관통시켰다. 무솔리니는 쓰러졌으나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아우디시오는 다가가 가슴에 다시 한 발을 쏘았다. 무솔리니는 몹시 고통스러워하였다. 아우디시오는 그의 운전병에게 "저 작자 좀 봐, 이제야 얼굴에 감정이란게 나타나는군"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와 함께 있었던 병사들은 그날 밤 총살되었다.

1945년 4월 29일 무솔리니와 페타치, 그리고 함께 처형된 파시스트들의 시체는 트럭에 실려 밀라노로 보내졌다. 새벽 3시 그들의 시체가 일라노의 피아차 로레토에 내려졌다. 그곳은 일전에 파시스트당에 의해 15명의 반파쇼 운동가가 처형된 곳이었다. 수많은 군중에 의해 차이고 짓밟힌 그들의 시체는 주유소 지붕에 거꾸로 매달렸다. 다만 페타치는 이 때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거꾸로 매달았을 때 팬티를 노출했다. 이에 어떤 사람이 페타치의 치마를 묶어서 팬티가 드러나지 않게 했다.

같은 날 한때 "무솔리니가 신이다."라는 발언을 한 파시스트 왕당파 아실레 스타라체 역시 붙잡혀 처형된 뒤 무솔리니가 매달린 피아차 로레토로 실려왔다. 파르티잔들은 곳곳에 숨거나 저항하던 파시스트들을 붙잡아 처형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를 여기에 매달아 두었다.

 

후세인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 1441호를 근거로서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후 은신처에 3년 이상 옮겨다니며 은신하였으나 마침내 영화 레드 던에서 이름을 따온 미군의 레드 던 작전으로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았다.

2006년 11월 5일 1심 재판에서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사담은 "나는 사형당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다. 이란과 손잡으면 안되며, 경계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이후 항소했으나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은 사형을 확정하여 2006년 12월 30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처형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기도 했다. 그의 처형으로 인해 저항세력 계파 중 하나인 후세인 지지파들의 반발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무바라크
무바라크의 건강은 2011년 4월 검찰 조사가 시작됐을 때부터 증속적으로 악화됐으며, 같은해 8월 일 첫 재판을 받은 후 카이로 인근 병원에 머무다가 2012년 6월 2일 무기형을 선고받은 후에는 교도소 병원에 이송되었다. 무바르크는 무기형을 선고 받은 이후에는 병세가 급속적으로 악화되었다가 6월 12일에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다음날 의식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일주일 후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 현재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에 무바라크 사망설까지 제기 되지만 이집트 측은 이를 부인했다.

차우세스쿠

혁명정부 측은 그 전부터 차우셰스쿠 부부를 상대로 한 재판울 논의하고 있었으나 "잘못되면 차우셰스쿠 지지자들이 역으로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차우세스쿠 부부는 12월 25일 구국전선의 군사 법정에서 인민재판으로써 반역과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차우셰스쿠의 변호사 카를로마저 검사로 돌변해 "당신 편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지만, 당신이 이 나라에 해 놓은 짓을 보시오. 편을 들어준다고 해결될 문제요?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오. 상식으로 누가 봐도, 아무리 당신에게 유리하게 설명해도, 당신이 이 나라 루마니아를 멸망으로 몰고간 것을 부인할 수가 없소. 내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담당했지만, 당신 같은 최악은 예는 처음이요. 나도 당신을 포기했소."라고 차우셰스쿠에게 말할 정도였는데도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국민을 배려해 사력을 다했다고 우겨서 재판장에게도 크게 미움을 샀지만, 소총수들은 차우셰스쿠를 죽이고자 총을 준비했고 차우셰스쿠의 처형에 동참할 사람들을 뽑기로 했는데 지원자는 필요 인원 수의 십 배인 삼십 명이어서 삼십 명 중 팔 명만 선발했지만 그 사람들 전부가 지지하자 딱 삼 명만 선발하기로 한다.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둘은 눈물을 흘리더니 벽을 보고 "반역자들에게 죽음을!"이라 외치더니 사형 집행이 시작되자 좌파 세력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인 "인터내셔널"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일 절이 채 끝나지도 않아 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고 총탄 각각 일백육십여 발을 세례받고 처참하게 죽었다. 차우셰스쿠가 처형되는 장면은 공개로 이루어졌고 생중계로 진행되었다.

사형 집행 이후,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신은 공동묘지 구석에 처박힌 채 묻혔다. 원칙상 유럽식 무덤은 대리석으로 만들고 장식까지 하지만, 차우셰스쿠 부부의 무덤은 그냥 흙으로만 대충 만들었다. 그 주변에는 잡초와 나무만 가득할 뿐이다. 비석도 당장 세워지지 않았는 데다가 함께 묻히는 것도 불허돼서 50m쯤 떨어진 각자 무덤에 매장됐으며, 차남 니쿠 차우셰스쿠도 공산 체제 붕괴 후 병사했으나 차우셰스쿠의 묘지는 2010년 친자 확인 소송 문제로 말미암아 파헤쳐졌다.

 

 

 

전두환

아주 잘 살고 있다. 국민 세금으로 경호를 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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