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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염원

  • goldidea
  • 조회 2613
  • 2018.02.1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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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염원 및 서복의 행방)

알다시피 B.C 221년, 중국 전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



중국을 통일한 그의 인생에 최대 염원은 바로 '영생' 이었다


그는 영생을 위해 전국 각지의 연금술사들을 불러 들이고



밤낮으로 영생약을 만들게 하였으며,


자신이 몸소 훌륭한 도사들을 찾아다니러 명산으로 행차를 하기도 하며,



불로초가 있다는 중국 각지의 명산을 뒤지기도 하였다.



허나, 끝내 돌아오는 것은 늘어나는 주름뿐 이었다.


진시황의 영생에 대한 염원이 점차 지쳐갈 무렵,


누군가가 등장했는데 그는 바로 '서복' 이었다.



그는 진시황에게 상주문을 올렸다.



황제 폐하, 저 동해 바다 가운데에는 무릉도원과 같은 섬이 있고,


그 섬에는 신선들만이 사는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산)이 있사옵니다.


그 산에서 영생의 약초인



'불로초'가 있다고 하옵니다.


이에 진시황은 서복에게 수많은 금은보화를 주고



불로초를 찾아오라 명하였다.


허나, 명을 받고 10년이 지나도 서복으로부터 기대할만한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이에, 진시황은 낭야(지금의 산동성 청도 남쪽)에 이르러


서복을 불러 그간의 성과를 물었다.



어찌, 불로불사의 약초에 대한 성과를 보았으냐?


이에 서복은 황제 폐하, 동쪽 바다에 큰 교어(고래)가



있어 삼신산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사옵니다. 라고 하니


진시황은 직접 고래잡이 선단을 지휘하여 바다로 나갔고, 실제로 고래를 만났고, 잡기에 이르렀다.


이에 서복은, 다시 한번 꾀를 내어 진시황에게 아뢰었다.


황제 폐하, 바다에서 만난 신선이 불로초를 구하려면


동남동녀와 오곡의 종자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사옵니다. 고 하니,


진시황은 자신의 꿈에 한층 더 가까워진것 같았고 서복에게



3천 명의 동남동녀와 각종 기술자, 고래잡이 기구와 전문가,



온갖 금은보화를 주었다.


기원진 200여년, 지금은 물론이고 그 당시로써 어마어마한 물자와 인력을 얻은 서복은 호기롭게


불로초의 명산 삼신산으로 떠나였다.



이후, 서복은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복은 그 많은 인력과 물자를 가지고 대체 어디로 간것일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의견이 오가는데


그 중



서복의 일본 정착설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진시황으로부터 3천 동남동녀와 많은 고급 인력들, 금은 보화를 받은 서복은


한국(당시 고조선은 위만 조선이 들어오기도 전이었다)을 거쳐 일본에 도착한다.


몇몇 학자들은 서복이 지금의 와카야마현 구마노의 신궁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도 그를 모시는 사당과 그의 묘라고 불리는 것이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의 전설에 부회하여 만든 것이겠지만)



또한, 서복이 상륙한 구마노는 예전부터 일본 고래잡이 어업의 중심지 이다.



구마노 고래잡이 어업의 기지


태지정은 "진지포"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래잡이를 진나라 사람들이 전해준 기술임이 분명하다.


또한 당시(기원전 3세기 경)일본 문명은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진입할 때,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그 배경에는 도래인들의 활약이 강하게 작용한 특징이 있다.


또한 일본 각지에 서복의 이름과 관련된 묘, 비 ,궁 신장 등 유적지가 50여곳에 이르고, 내려오는 전설고사가 30여개 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정말 수천명을 이끌고 온 서복이 일본에 도착하고 정착하며,


일본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였을까?


아니면 일부의 주장처럼 우수한 문명을 가진 서복이 일본에 도착해 일본 왕조를 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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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진시황이 마셨던 술은..



수은주 살살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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