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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도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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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3111
  • 2017.01.0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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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도를 이야기하기 전에 사무라이가 언제 어떻게 생겼는가를 먼저 짚어보자.


10세기 경 일본사에서는 헤이안 시대라고 하는 시기 중엽이었다.

이전의 일본은 덴노가 집권하는 율령제 기반의 중앙왕정국가였다.

잘 이해가 안되면 우리나라 삼국시대 정치체계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10세기 초 귀족 가문인 후지와라 가문이 덴노의 권력을 넘어서고 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가 된다.

이후로 덴노가 직접 통치 권한을 가진 시기는 메이지부터 태평양 전쟁 때 정도다.(사실 이때의 통치권한도 실질적인지 명목상인지 의견이 갈리긴 한다.)

귀족이 왕가보다 강한 권력을 휘둘러서 좋은 꼴을 본 사례는 어느 나라나 별로 없다.

일본도 마찬가지라 율령제가 무너져 중앙의 지배력이 지방에 미치지 않게 되었다.

지방의 유력자들은 서로 땅을 먹으려고 경쟁했고 그나마 가진게 있던 백성들은 유력자에게 땅을 바치고 무장하여 사병이 되었다.

이것이 사무라이의 기원이다.




이후 약 300년 가량 사무라이들은 유력자들의 사병 노릇을 해왔다.

즉, 이때의 사무라이는 단순한 칼잡이 계층으로 무사도라고 할만한 가치관이나 규칙 등이 잡히지 않았다.

자신을 더 좋게 써줄 주인이 있다면 얼마든지 주인을 바꾸기도 하고 그게 흉이 되기는 커녕 커리어로서 작용했다.

사무라이의 무장이 화려한 것도 '내가 이렇게 잘 싸웁니다. 나를 봐요.' 라는 일종의 홍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용병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의 칼잡이들은 전국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세력이 큰 사무라이는 지배계급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에도시대에 접어들어 다이묘라는 지배계급 중에는 사무라이 출신이 많았다.

문제는 이들이 지배계급의 권위에 맞는 교양이나 예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원채 싸움판에 살던 놈들이라 강력한 중앙집권을 원했던 에도막부로서도 불안요소였다.

그래서 막부는 주군에게 충성하고 의를 행한다는 유교 정신을 적극 도입해(이때 조선, 특히 이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지금도 일본 유학계에서는 이황을 큰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 사무라이들이 지켜야할 법도를 만들었다.

수치를 당하면 할복을 한다던가 항상 칼을 지니고 다닌다는 등 우리가 오늘날 무사도로서 알고 있는 것들은 대개 이때 생겨났다.

또한 검술은 전투보다 신체단련과 정신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검도로 바뀌고 차를 마시는 예법인 다도가 생기는 등 약 500여년 만에 문화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자리를 잡았다.

즉, 충을 위에 두고 인의예지신 같은 유교적 가치관을 지배계급에 도입한 것이 무사도였다.

조선의 사대부와 비교해보면 출신이 선비냐 칼잡이냐의 차이지 근본사상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항이후 사민평등 정책에 의해 사무라이들은 칼을 빼앗겼고 더이상 사무라이가 아니게 되었다.

사무라이와 무사도라는 말은 구시대의 계급체계의 산물이 되어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다시 무사도가 일본에서 주목받기 시작한건 1900년대 들어 군부가 집권하면서부터였다.

군부는 군인들의 사상교육을 위해 무사도를 도입하고자 했고 그 기반이 된 책이 무사도: 일본의 혼이라는 책이었다.

이름만 보면 에도시대의 예법서 같은건가 싶지만 사실 이 책은 1900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책이다.

저자인 니토베 이나조는 서양인 친구에게서 '서양에선 종교를 기반으로 도덕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일본은 어떤가?'라는 질문에 당황해 이 책으로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사무라이가 사라진지 약 30년 가량 지나 그다지 사무라이에 대해 남아있는게 없었던지라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에 서양의 기사도를 첨가해서 책을 썼다고 한다.

집필 과정이야 어쨌든 동양의 신비 같아 보였는지 서양에서는 인기있는 책이었고(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나와있으니 관심있으면 읽어보자) 이를 일본 군부가 역수입해 명령에 복종하여 죽기까지 감수하는 군인을 만드는데 입맛대로 써먹었다.




마지막으로 일본 제국의 무사도와 에도시대의 무사도를 비교해보자.

-충 만이 무사도가 아니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충이 중요하지만 인의예지신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 따라서 주군이 도의에 어긋나는 명을 내리면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것이 에도시대의 무사도였다. 이점에서 일본제국의 무사도는 사실 無士道였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제국시기에 아직도 사무라이를 자처하거나 사무라이의 후손이었던 사람중에는 이 점에서 일본 제국에 환멸하여 은둔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자원이나 무기의 차이따위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사상은 사무라이들에게는 없었다. 이들은 언제나 이기기 위해 더 좋은 무기를 도입하려 노력했다. 상상이 잘 안가긴 하지만 에도시대 말기에는 대포도 적극 활용했던게 사무라이다. 사실 멀리 갈것 없이 임진왜란때 조총이라는 무기를 적극 활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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