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이준구 교수의 말입니다.
국정교과서는 현대판 분서갱유다.
우선 분서갱유는 이러합니다.
(지식백과)
진시황 시대 분서갱유, 즉 전국적인 사상 탄압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사건은 기원전 213년 함양 연회에서 일어났다. 이 때 전국에서 부로(父老) 7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벌이다가 참가자 중 한 명인 주청신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의 실행을 찬양하자, 다른 참가자인 순우월이 옛 것을 버리는 것을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 당시 자리에 있던 이사가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려 있다면 통치에 해로울 것', '의약 · 점술 · 농업 등의 책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책들과 시(시경), 서(서경), 진을 제외한 국가들의 역사서를 불태울 것[2]'을 주장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것이 분서 사건이다.
1년 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실패로 끝난 진시황의 불로초 탐색을 놓고 '불로초 따위에 정신이 팔리다니, 이건 책 다 불태워서 고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임'이라는 식으로 진시황을 비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 명이 함양에 매장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갱유로 불리게 된다.
분서
진나라는 군현제도를 채용했으나 유학자 가운데는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찬미하고 황제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가 있었다.[1] 황제는 이설(異說)을 탄압하기 위하여 기원전 213년 박사관(博士官) 소장의 서적과 의(醫) · 약(藥) · 복서(卜筮) · 농업 서적 이외의 민간 소장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웠다.
갱유
분서가 있은 다음 해에는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 460여 명을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는데, 갱유에 대해서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이설(異說)이 많아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후난 성(湖南省)의 장사마왕퇴(長沙馬王堆) 3호묘(三號墓)에서 백서(帛書)인 《노자(老子)》, 《전국책(戰國策)》 외에 천문(天文), 역법(曆法), 오행(五行), 잡점(雜占) 관계의 다수의 서적이 발견되고, 또한 산둥 성(山東省) 린이 현(臨沂懸) 인차오산(銀雀山)에서 죽간(竹簡)인 《손자병법(孫子兵法)》, 《손빈병법(孫子兵法)》 등의 병법서가 발견되었다.[1] 모두 한(漢)의 문제(文帝)로부터 무제(武帝) 초년까지의 것인데, 이와 같은 서적이 정리되어 남아 있어, 분서(焚書)가 엄중히 실행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1] 다만, 이러한 서적 중에 유교 관계의 서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유가에 대한 탄압이 특히 철저했다는 것만은 추측되었다.
이준구 교수의 말입니다.
“역사를 쓰는 일은 역사학자에 맡겨라”
“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에 해당하는 끔찍한 일”
“전문가들이 공들여 써놓은 검인정 국사 교과서들을 죄편향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대서 모두 폐기해 버릴 텐데, 그것이 진시황이 책을 태워버린 '분서'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느냐”
“이 땅의 명망 있는 모든 역사학자들이 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숨어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선비들을 구덩이에 파묻은 진시황의 '갱유'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일”
“어제 국정화 확정 고시가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란 말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저들은 역사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축배를 들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역사의 죄인'이 되어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을 자충수를 둔 것”
추가로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두 대통령은 모두 자신을 철벽처럼 지지하는 절반의 국민에 기대어 나머지 절반의 국민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지지층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와 다른 소리에는 귀를 막는다면 대통령의 자격이 눈꼽만큼도 없는 셈”
아주 속이 후련하면서도 옳바른 말씀이네요.
학자로서 양심과 자긍심을 잃지 않고 최ㅁㄹ이라는 누구처럼 집권당의 눈치를 보면서 이랬다 저랬다 행동하는 그런 모습과 달라서 박수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