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전 만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독일이 5골 차로 이길 것”이라고 했다.
나는 “두고 봅시다. 우리가 이깁니다!”라고 맞섰다.
경기를 마친 뒤 다시 만난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워낙 축구를 좋아하는 분이니 독일 대표팀의 패배와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만약 독일을 무너뜨린 상대가 우리나라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며칠은 의기소침해 있었을지 모른다.
독일과의 경기에서 한국의 첫 골이 들어가자마자 운동장에서 만난 로타어 마테우스 같은 독일 축구의 전설들도
"너희는 이길 자격이 있는 경기를 했다." 고 말했으며 친구들의 축하 문자가 아침 식탁까지도 계속 딩동! 딩동거리고 있다.
경기를 마치고 우리 대표팀 라커룸에 내려갔다.
울보 흥민이는 말할 것도 없고 성용이, 현수, 자철이, 주호…. 우리 선수들을 한 번씩 안아주는데 내 품에 안겨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그간의 맘고생이 고스란히 나에게 박혀 왔다.
![흥민.jpg [중앙일보] 차범근의 월드컵 붐붐 - 마테우스 : 너희는 이길 자격이 있다](/data/file/0201/1530243794_XTBnszZg_1fe9633d949c0eea2a27332906bf37ab.jpg)
경기를 앞두고 할 이야기는 아니어서 기다렸지만 우리 축구의 현실은 문제가 많다. 인정한다.
대한축구협회도, 현장 관계자들도, 선수도, 나를 비롯한 우리 축구인들도 지금처럼 변화를 거부한다면 다음 월드컵을 기약하기 어렵다.
기업들은 축구에서 발을 빼고 있고 운동장을 찾는 팬들은 동남아시아의 관중보다도 적은 상황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선수들은 일본·중국으로 진출하던 시절을 지나 이젠 태국·베트남·말레이시아로 나가고 있다. 우리 선수들이 K리그보다 동남아 국가에서 더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겠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 축구는 물도 영양분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굵은 열매를 기다리는 격이다.
한국 축구는 물도 영양분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굵은 열매를 기다리는 격이다.
손흥민 같은 선수가 나왔다는 것은 축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잘 키운 게 아니고 그냥 생겨난 거다.
선물받은 거다. 하지만 선물은 항상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 밤 독일과 경기에 나선 우리 선수들은 한계 속도를 넘어서 달렸다.
엔진에는 열이 나고 파일럿은 어질어질하다.
그런 선수들에게 “거봐. 그렇게 하면 되잖아!”라고 쉽게 말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내장 속에 고여 있던 에너지 하나까지 모두 소진한 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우리 선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길 바란다.
그들은 정말 힘든 일을 해냈다.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그간의 고난이 떠올라 마음 아픈 밤이기도 했다.
선수들 곁에서 도운 우리 아들 두리에게도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