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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er's Tribune] (스압) 제르단 샤치리: 나만 지키는 무장 경호원이라고?

  • 작성자: stlou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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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기사
  • 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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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월드컵 조별리그 E조 세르비아-스위스 경기에서 역전 결승골을 넣은 스위스 제르단 샤치리의 이 독수리 셀레브레이션이 논란이 되었었죠. 


샤치리는 스위스 국적입니다만, 부모님이 코소보 출신 알바니아인이고 샤치리가 어렸을 때 스위스로 이주했습니다. 


그래서 샤치리는 스위스인이면서도 알바니아, 코소보의 정체성을 갖고 있고, 그것이 세르비아와의 경기에서 알바니아의 상징인 '독수리' 셀레브레이션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코소보와 코소보 전쟁에 관한 간략한 내용은 꺼무위키를 한번 참고해 보세요. 


코소보: http://namu.wiki/w/%EC%BD%94%EC%86%8C%EB%B3%B4

코소보 전쟁: http://namu.wiki/w/%EC%BD%94%EC%86%8C%EB%B3%B4%20%EC%A0%84%EC%9F%81


이 기사는 6월 22일에 올라왔지만 월드컵 개막 직전쯤에 인터뷰한 것으로 보입니다. 샤치리가 어린 시절 이민자로서 가난하고 힘들었던 삶, 초창기 선수시절에 느낀 놀라움과 기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글이라 다소 길지만 전문 번역해봤습니다. 


*는 역자 주입니다.


2018.06.22.


우리 집은 난방이 안 됐다. 그저 커다란 난로만 있었을 뿐. 우리 집은 바젤의 작은 농장에 위치한 아주 오래된 건물이었고, 우리 집의 방식은 항상 그랬다. 별로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몸에서 열이 나도록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내 형의 방은 난로와 멀리 떨어진 위층에 있었기 때문에 형은 항상 추위에 대해 불평하곤 했다. 겨울이면 형은 거의 이불 5장은 덮고 잠을 청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4살 때, 코소보 전쟁이 터지기 전 코소보를 떠나 우리 삼형제를 데리고 스위스에 정착했다.* 결코 쉬운 삶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독일어를 할 줄 모르셨기 때문에 레스토랑에서의 설거지로 일을 시작하셔야 했다. ** 나중에는 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자리를 얻으셨다. 어머니는 도시의 사무실 건물에서 청소부로 일하셨다. (나는 진공청소기를 몰고 다녔고 형들은 창문을 닦았다)

(*샤치리가 1991년생이므로 그의 가족이 코소보를 떠난 것은 1995년이고, 코소보 전쟁이 발발한 것은 1998.)

(**스위스에서는 4개의 공용어가 쓰이는데, 가장 많은 75%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독일어입니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사투리인 레토-로망스 어가 그 뒤를 잇습니다.)

 

스위스의 물가는 모두에게 아주 비싸지만, 우리 부모님께선 아직 코소보에 남아 있는 다른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많은 돈을 보내주고 계셨기 때문에 더욱 생계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매년 비행기를 타고 남은 가족들을 보러가곤 했다. 사실 어머니는 지금도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행기에 타기만 하면 네가 아주 못살게 굴었단다. 항상 의자에 올라타서 뒷사람 머리를 만지고! 조용할 때가 없었지.”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코소보를 방문할 수 없게 되었고, 그곳에 남은 가족들의 상황은 매우 어려워졌다. 삼촌의 가게는 불에 탔고, 모두가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버지께선 보낼 수 있는 최대한 많은 돈을 전부 보내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생일날을 빼면 다른 데에 사치를 부릴 여력이 없었다.

 

사실, 생일과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호나우두는 어린 시절 내 우상이었다. 원조 호나우두 말이다. 그의 플레이는 나에게 마치 마법처럼 느껴졌다. 1998 월드컵 결승전, 그가 부상을 당하고 브라질이 프랑스에게 패한 날, 나는 너무나도 슬퍼서 울고 또 울었다. 7번째 생일날은 월드컵이 끝나고 3개월 후였고, 나는 그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어머니께 노래를 불렀다. “생일선물로 노란색 호나우두 유니폼을 받고 싶어요. 제발요, 그것만 있으면 돼요.”

 

생일날, 어머니는 상자를 하나 건네셨다. 나는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는 노란 호나우두 유니폼이 들어있었다. 물론 그것은 시장바닥에 가면 구할 수 있는 모조품이었다. 아마 패치도 달려있지 않았을 거다. 그저 커다란 초록색 숫자 9가 쓰인 노란 유니폼. 부모님께선 진품을 살 돈이 없으셨던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내 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나는 10일 내내 매일매일 그 유니폼과 노란색 바지만 입고 다녔다.

 

나는 학교에서 유일한 이민자 출신 아이였고, 아마 스위스 아이들은 내가 왜 그렇게 축구에 집착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스위스에선 축구는 그저 스포츠일 뿐이다. 다른 곳에서 축구가 그 자체인 것과는 달리. 나는 4년 후 호나우두가 그 유명한 삼각형 모양 머리를 하고 2002 월드컵에 출전했을 때, 미용실에 가서 호나우두컷 해주세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때 내 머리는 금발의 곱슬머리였기 때문에, 내 헤어스타일은 완전히 이상하게 돼버렸다. 나는 그대로 학교에 갔고 모든 애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쟤, 머리에 뭔 같은 짓을 해놓은 거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였다. 내가 다닌 학교는 마을의 부자 구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우리 집이 있는 구역은 가난했다. 하지만 대신 그곳에는 아주 좋은 축구가 있었다. 어머니는 항상 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난 방과 후엔 언제나 축구를 하러 갔다. 나는 사람들이 스위스가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고, 실제로도 많은 장소들이 그렇지만, 이 공원은 정말 쩔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 마치 UN 같았다. 터키인, 아프리카 사람, 세르비아인, 알바니아인, 전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축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가 그곳에 모였다. 힙합을 하는 독일인, 프리스타일 랩을 하는 아이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아랑곳하지 않고 경기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소녀들, 모두가 말이다.

 

그곳의 축구는 진짜  축구였다. 선수들은 항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곤 했다. 물론 나는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공원에서 축구하는 것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어린 꼬맹이였고, 시시껄렁한 농담따먹기를 하는 대신 전력을 다해 축구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땐 어떻게 플레이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4살 때, 나는 FC 바젤의 유스팀에 있었는데, 마침 프라하에서 열리는 나이키 컵에 참가할 기회가 생겼다. 문제는 내가 그것 때문에 학교를 며칠 빠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선생님께 결석이 가능할지 여쭤보았으나 그는 안 된다고 하셨다. 스위스 교사들은 굉장히 엄격한 편이다. 나는 생각했다. ‘X, 어쩔 수 없네. 아픈 척 하고 빠질 수밖에.’

 

그래서 어머니께서 학교에 내가 독감인지 뭐시긴지 하여튼 병에 걸려서 아프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셨고, 나는 프라하에 가서 대회에 참가했다. 나는 정말, 정말 잘 했고, 다른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바라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와우, 쟤가 바젤 출신이라는 그 녀석이구만. 졸라 잘하네기분이 아주 좋았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여전히 조금 아픈 척을 하며 월요일에 다시 학교에 갔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께서 말하시기를, “제르단, 어서 이리 와봐. 어서, 어서.”

 

선생님은 나에게 손짓을 하시며 책상 밑에서 신문을 꺼내셨다.

 

그것을 가리키시며 , 그래, 그동안 단 말이지?”

 

신문엔 대회 최우수선수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나의 사진이 있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보며 생각하기를, 이런... X!’

 

나는 그 대회 이후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가족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두 형들도 FC 바젤에서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대회에 참가해야 할 때면, 항상 돈이 세 배로 들었다. 내가 16살 때 우리는 스페인 어디로 전지훈련을 떠나게 되었는데, 대충 비용이 700 스위스 프랑 정도였다. *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안 된다. 우리는 이걸 낼 돈이 없어.”

(* 700 스위스 프랑은 현재 한화로 약 80만 원 정도. 방금 전의 일화가 2007년 시점인 것을 감안하면 대략 현재의 100~150만 원 정도? 라고 생각하면 될 듯.)

 

그래서 우리 삼형제는 비용을 내기 위해 셋 모두 알바를 했다. 나는 3주 동안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정원의 잔디밭을 깎아주었고, 두 형 중 한 명은 나는 형이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도 사실 잘 몰랐다 내가 아는 건 형이 무슨 유리를 다루는 큰 공장에서 일했다는 것뿐이었다. 어찌저찌해서 우리는 간신히 비용을 모아 스페인에 갈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스페인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 했던 건, 우리가 그 비용을 낼 여력이 없다는 것을 팀 동료들이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16, 17살 먹은 아이들이 몰려다니면서 어떤 식으로 다른 애를 놀려대는지 잘 알 것이다. 훈련이 끝나면 모두가 매점에 가서 군것질을 했지만, 나와 형들은 돈이 없었고 그래서 매일매일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하는 이유들을 만들어내서 변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다른 방식으로 더욱 굶주리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최고가 되기 위해 굶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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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내가 17살이 되었을 때 나는 FC 바젤의 1군에 콜업되었다. 나는 경기 후반에 투입되어 한 20분 정도를 뛰었는데, 나는 스스로 꽤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훈련장에 갔을 때, 유스 팀 코치가 말씀하시길 대체 그건 뭐였냐? 뭔 생각으로 그따구로 한 거야?”

 

나는, “무슨 말씀이세요?”

 

그가 말하길, “방금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왔다. 감독님께선 넌 할 줄 아는 게 드리블밖에 없다고 하시더라. 넌 다시 2군으로 내려갈 거다. 그게 다야.”

 

커다란 충격이었다. 난 그때 FC 바젤에서 내 선수생활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2주 후, 감독이 해고되고 새 감독이 왔다. 그는 나를 다시 1군으로 콜업했고, 난 기회를 두 번 놓치지 않았다. 재밌는 건 그가 나를 레프트 백으로 기용했고, 나는... , 아시다시피, 공격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수비수들이 언제나 나를 향해 빨리 내려와 이 자식아!” 하고 소리쳐야만 했다는 것이다.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스페인에 가기 위해 이웃집 정원의 잔디를 깎던 16살의 어느 날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18살이 되어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스페인과의 경기 날, 이니에스타를 바로 내 눈앞에서 보며 , TV에서 보던 사람이네, 바로 저기에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평생토록 기억할 것은, 우리가 도착 첫날 호텔에 들어갔을 때 커다란 총을 든 무장 경호원들이 모든 방문 앞에 서서 방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직 우리만을 지키기 위한 사설 무장 경호원들.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보였다. 왜냐하면... 난 불과 1년 전만 해도 밤마다 집 앞 공원에서 축구를 하곤 했으니까! 이제는 나를 위한 사설 무장 경호원도 있단 말이야?

 

내가 월드컵에 출전한 것이 부모님께는 아주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은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스위스로 이주했고 부모님께선 우리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하셨기 때문이다. 난 나에게 두 개의 고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것뿐이다. 스위스는 우리 가족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나도 스위스 국가대표팀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코소보에 갈 때마다, 나는 그때도 역시 고향에 온 기분을 느낀다. 그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본능에 의한 것이다.

 

cb38d4f5-xherdanshaqiriartboard-1.jpg [Player's Tribune] (스압) 제르단 샤치리: 나만 지키는 무장 경호원이라고?


 

2012년에 알바니아와 경기했을 때, 나는 신발에 스위스, 알바니아, 코소보의 국기를 새겨 넣었고, 몇몇 스위스 언론들은 그것에 대해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그걸로 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에겐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건 그저 내 정체성이다. 단지 그뿐이다. 전쟁과 가난을 피해 더 좋은 삶을 찾아 이주한 모든 사람들을 환영한다는 것이 스위스의 가장 좋은 점이다.

 

스위스에는 물론 호수나 산 같은 그런 훌륭한 자연 경관도 있다. 하지만 스위스에는 또한 내가 터키인들, 세르비아인들, 알바니아인들, 아프리카 사람들과 함께 축구했고, 소녀들과 독일인 래퍼들이 있는 그 공원도 있다. 스위스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2018 월드컵 경기장에 들어설 때, 나는 이번에도 역시 스위스와 코소보의 국기를 내 신발에 새겨 넣을 것이다. 정치적인 메시지나 뭐 그런 게 아니다. 단지 그 국기들이 내 삶을 말해주기 때문일 뿐이다.

 

하지만 걱정마라, 스위스 국기는 내 왼발에 있으니까.



기사 링크: http://www.theplayerstribune.com/en-us/articles/xherdan-shaqiri-switzerland-now-i-got-my-own-army-guy


의역 있습니다. 오타 및 오역 지적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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