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옹(98)은 22일 30도가 넘는 폭염의 날씨에도 노구를 이끌고 서울 서초구 대법원 동문 앞에 섰다.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을 지연시키기 위해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대법원이 ‘재판거래’했다는 의혹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자리였다. 이옹은 2013년 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은 지금까지 최종 판결을 내리지 않아왔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날 아침 일찍 광주광역시에서 올라온 이옹은 마이크를 잡기 전부터 울먹이고 있었다. 이옹은 또렷하지 않은 목소리로 “빨리 죽기 전에 (재판을) 해결해주시면 아주 마음이 기쁘겄네. 내일 모레라도 내가 죽고 싶은데 이 법원을 보니까 살고 싶네”라고 하면서도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옹이 목이 메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옹과 함께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낸 강제징용 피해자 3명 중 여운택·신천수옹은 재판 결과를 못보고 사망했는데, 이옹은 이들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이날 처음 알게됐다. 이옹은 동료들 생각에 가슴 아파했다. 이옹의 재판을 도와온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는 “이옹이 ‘98세까지 이런 꼴 보려고 살았냐. 먼저 간 동료들한테 내가 살아있는게 창피스럽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온 한 참가자는 이옹 등이 “재판하다가 세월 다 버리신 분들”이라고 했다.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 고등법원의 파기환송 승소 판결이 난 지 5년여가 지났지만 대법원은 언제 결과를 내놓을 지 감감무소식이다. 최근 검찰수사를 통해 강제징용 사건 선고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가 드러나고 있다. 2013년 12월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만나 앞서 승소판결 난 강제징용 재판을 연기하고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파기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듬해에는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김기춘 실장과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 등을 만나 재판 진행방향을 추가 협의했다.
이옹은 대법원이 강제징용 사건으로 재판거래를 시도했다는 내용을 듣고 “대법원이 썩었지 썩었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산국가나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것”이라며 “이 일을 빨리 잘 밝혀서 청산하고 (관련자를) 처벌하도록 부탁을 한다”고 했다.
이옹과 대리인단 등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대법원 민원실로 들어가 대법원의 사과를 촉구하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계획에 없던 대법원 내부로의 이동은 ‘대법원이 어떤 못된짓을 했는지 봐야겠다’는 이옹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이옹이 휠체어를 타고 지나간 통로 뒷편에는 ‘공정한 눈으로 밝은 세상을 만드는 대법원’이라는 안내판이 서있었다.
이옹은 대법원 민원실에 들어온 뒤 “죽어도 내 원이 없네. 참말로 내가 자랑을 많이 해야겄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송을 강제지연시켰다고 처음 들으셨을 때 마음이 어떠셨냐’는 질문을 받자 이내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옹은 흐릿한 목소리로 20년 전 세상을 떠난 부인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에서 돈이 나오면 할머니 내 마누라랑 잘 하려 했는데 (부인이 재판결과를) 못보고 돌아가 서러워죽겠다.” 이옹은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향해 “고맙다”는 말을 잊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