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15 마산의거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고, 이는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20년 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승만에서 박정희라는 인물만 바뀌었을 뿐 ‘자기 권력’에 심취해 있는 독재자를 타도하려는 민주화의 외침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독재권력의 틀을 다진 박정희 정권은 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뇌관이 하나씩 터져 나왔다.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한 증세와 물가 폭등으로 국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렸고, 1978년 제2차 오일쇼크로 중화학 공업마저 휘청거리며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맞았다.
박 정권의 실책은 곧바로 표심으로 나타났다. 1978년 12월 실시된 제10회 국회의원 선거는 불법 금권, 관권선거였음에도 야당인 신민당에 패배하고 말았다. 거대 야당이 되자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거세졌고 이에 대항해 민주화 시위 또한 타올랐다. 민주화의 횃불은 부산에서도 지펴졌다. 1979년 10월 16일 ‘유신 대학’이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로 데모와 거리를 두고 있던 부산대학교에서부터 시작됐다. 수백 명의 학생들로 시작된 시위대는 부산 중심가에 모여들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학생들의 곁을 시민들이 함께했다. 먹을 것을 나눠주고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는 역할은 시민들의 몫이었다. 회사원부터 교복 입은 학생들, 노동자 등도 시위에 가세했다. 시위가 격해지자 박 정권은 10월 18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 공수여단을 투입시켰다. 그러나 시위는 이제 부산을 넘어 마산으로 번져나가면서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정권을 붕괴시킨 결정타가 됐으며, 박정희는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부하의 총에 쓰러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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