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무 선생(1883. 6. 29 ~ 1924. 9. 7)
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에 빛나는 대한
국민회군 사령관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군복을 벗고 향리로 내려가 독립투쟁을 준비하였다.
경술국치 후 만주에서 대한국민회 소속 국민회군을 조직하여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에 빛나는 대한
국민회군 사령관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군복을 벗고 향리로 내려가 독립투쟁을 준비하였다.
경술국치 후 만주에서 대한국민회 소속 국민회군을 조직하여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구춘선 등과 함께 중국 측과 긴밀히 협조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썻다.
명월구에 무관학교를 세워 사관양성과 전투력 배양에 힘썻으며, 일본 정규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
명월구에 무관학교를 세워 사관양성과 전투력 배양에 힘썻으며, 일본 정규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
섬멸하여 독립군 최초의 승전을 거두어냈다.
그 후, 항전기지인 청산리로 이동, 일대 격전을 대비하다, 일본 정규군 2만여 명과 10여 차례에 걸친 혈전 끝에
그 후, 항전기지인 청산리로 이동, 일대 격전을 대비하다, 일본 정규군 2만여 명과 10여 차례에 걸친 혈전 끝에
청사에 빛나는 청산리 대첩을 거뒀다.
경신참변 후 독립군을 이끌고 밀산을 거쳐 자유시에 도착, 부대를 재편하다, 자유시 참변 이후 북간도로 이동,
경신참변 후 독립군을 이끌고 밀산을 거쳐 자유시에 도착, 부대를 재편하다, 자유시 참변 이후 북간도로 이동,
독립군 재기를 위해 노력하던 중 일경의 습격을 받아 총상을 입고 피체되었다.
중상으로 용정에 있는 자혜(慈惠) 병원에서 치료하였으나 다음날(9. 7) 42세를 일기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승패여부를 떠나, 투쟁 자체로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민간 중심의 무장조직으로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군의 활동은 그만큼 더욱 값진 것이다.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승패여부를 떠나, 투쟁 자체로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민간 중심의 무장조직으로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군의 활동은 그만큼 더욱 값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9월 7일 북간도 용정에서 순국한 안무 장군의 빛나는 위업은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오늘은 독립운동가 안무 선생께서 서거하신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