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박성대 기자] [[역사 속 오늘] 4·19 혁명 발발]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군이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올랐다.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분노했고, 반정부 시위는 전국적으로 격화됐다.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이끌었다. 서울에선 같은 달 18일 고려대학생 3000여명이 시위로 인해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시가행진했다.
학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유진오 당시 고려대 총장의 만류로 시위를 중단한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가던 중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폭력배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유혈 참사가 발생한다. 정치깡패들이 학생들을 폭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56년 전 오늘(1960년 4월19일) 부정선거와 자유당 정권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된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약 3만여명의 시민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4·19혁명의 시작이었다.
재선거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이날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오후 6시40분쯤 시위대가 동대문 경찰서 앞을 통과할 무렵 경찰들은 시위대에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서울에서만 이날 약 130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자유·민주·정의'를 외치며 시위에 가세한다. 결국 4월25일 전국 대학교수단 258명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고, 국회가 대통령의 하야와 정·부통령 재선거를 결의하자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한다.
4·19혁명은 특정 세력이 정권 탈취를 위해 벌인 것이 아닌 학생과 시민들이 부패한 절대권력과 부정선거에 항거해 자발적으로 봉기한 시민운동으로 평가된다. 혁명 이후 과도 정부를 거쳐 6월15일(6·15 개헌) 제2공화국이 출범한다. 하지만 제2공화국은 이듬해인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의해 막을 내린다.
박성대 기자 spark@mt.co.kr
4. 19혁명때 돌아가신 순국선열들을 위해 잠시 나마 위로드립니다.
당신들의 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