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경찰의 희생자가 있더라도)
2)일반 시민 피해 없도록
3)주동자 외는 연행치 말것(교내에서 연행금지)
4)경찰봉 사용 유의(반발, 욕설 엄금)
5)주동자 연행시 지휘보고(식사등 유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경찰국장으로 광주와 전남지역 치안을 책임졌던 고 안병하 경무관(1928∼1988년·2017년 11월 치안감 추서)이 남긴 ‘데모 제지에 임하는 방침’이다.
이 방침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 진입에 동원된 경찰에 하달됐다.
고 안병하 경무관이 남긴 비망록에 적힌 ‘데모 저지 방침’.
안 경무관은 1979년 2월 전남도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가 5·18기간 중인 1980년 5월24일 계엄군에 연행됐다.
그는 5월26일 경찰국장에서 직위해제 됐고 6월 강제사직했다.
계엄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그는 1988년 10월 숨졌다.
계엄군이 시위를 함께 진압하던 지역 경찰총수를 체포해 고문한 뒤 직위 해제한 이유는 뭘까.
안 경무관은 숨지기 1년 전 자신의 겪은 5·18상황을 손수 기록으로 남겼다.
7장의 비망록에는 그가 계엄군에 연행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상황들이 적혀 있다.
5·18 당시 전남도경찰국은 15개 경찰서의 경찰관과 기동대 등 1600여명으로 시위를 진입하고 있었다.
경찰 장비는 대형 가스 차 2대, 소형 가스차 4대 등이었다. 공수부대가 진입하기 전까지 광주는 비교적 평온했다.
5월16일 안 치안감은 전남대 학생회장과 면담 한 뒤 당시 금지됐던 야간 촛불시위를 허용했을 정도였다.
고 안병하 경무관이 남긴 비망록에 남긴 5·18 발생동기.
안 치안감은 5·18(광주사태) 발생 동기로 (계엄군의)과격한 진압으로 인한 유혈사태로 시민 자극, 악성 유언비어 유포로 시민들을 극도로 자극, 김대중씨 구속으로 자극 등 3가지를 들었다.
그는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는 없다”며 발포명령을 거부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음식을 제공하며 질서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계엄군이 진압과장에서 발생한 부상자를 경찰에 인계하자 경찰 간부에게 부상자들에 대한 치료와 식사를 책임지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계엄군이 잠시 광주외곽으로 물러난 사이 경찰 총수가 살펴 본 광주의 치안은 안정적이었다.
전남도청에 청사가 있었던 경찰은 5월21일 외곽으로 철수했다.안 치안감은 “5월24일 송정리 비행장(현 광주공항)에서 지휘 중 광주경찰서에 잠입한 바 광주서 외곽에는 시민군 20∼30명이 서를 보호하기 위해 경비를 서고 있었다”면서 “경찰 국장실은 그대로 있었고 경찰 철수 후 무경찰 상태에서 은행·금은방 등 강력 사건을 염려 하였으나 발생치 않았고 시민군에 의해 치안이 유지됐다”고 기록했다.
또 “군의 과격한 진압에 항의하던 도경 과장이 군인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고 안병하 경무관이 남긴 비망록에 적힌 5·18당시 광주 상황. ‘강력사건이 발생치 않고 치안이 유지됐다’고 기록됐다.
하지만 시민들 편에서 시위를 진압하던 안 치안감은 이날 광주경찰서에 경찰들을 지휘하던 중 ‘직무유기 및 지휘포기’혐의로 계엄군에 연행됐다.
계엄사령부는 5월27일 에서야 “광주사태와 관련, 전 전남도경국장 안병하를 연행해 조사중이다”고 발표했다.
안 경무관은 이 일로 경찰을 떠나야 했다.
안 경무관은 군인 출신으로 한국전쟁 참전 후 중령으로 예편, 총경으로 특채돼 경찰에 입문했다.
그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사망했지만 순직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충북 충주 진달래공원에 묻혔다.
1992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안 경무관은 5·18 유공자로 결정됐고 이어 2005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2006년에야 순직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안 경무관의 유가족들은 10일 그의 비망록과 치안감 추서 계급장, 사진 자료 등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했다.
경찰청은 지난해 그를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하고 마지막 근무지인 전남경찰청에 추모 흉상을 세웠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그를 치안감으로 추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32&aid=0002868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