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범 안두희는 중앙일보 1981년 12월 18일 인터뷰에서 "백범 암살 진상에는 더욱 복잡한 사연이 있다. 그래서 진상을 폭로하면 엄청난 사회적 파문이 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뒷날 번복하기는 했지만, 1992년 9월 23일 자신의 범행 배후를 추적해온 권중희 선생에게 "범행 직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으며, 이후 치하를 받았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안두희 "내 행동은 정당했다"
안두희는 1989년 KBS-TV에 출연해 "(내가 김구를 암살한 일은) 정당한 일이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나 자신이 분석해도 악의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내 행동"이라고 말했다. "다 혼자 하신 건가요?"라는 전용길 PD의 질문에는 "혼자?" 하고 되물은 후 "조금 더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세월이 돼야 나 개인을 놓고 이야기를 하지만…" 하고 얼버무렸다.
▲ 경교장에 차려진 김구 빈소-백범기념관 게시 사진 재촬영 |
ⓒ 백범기념관 |
2004년 9월 24일 서울신문은 〈암살범 안두희는 이승만의 측근이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서울신문은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숨겨진 진실이 방송을 통해 밝혀진다"면서 "KBS 1TV 〈인물 현대사(연출 정우성)〉는 그 동안 감춰진 안두희의 1950년대 행적을 파헤치는 '반공, 정치사찰의 1인자, 암살범 안두희'편을 24일 오후 10시에 방송한다"고 보도했다.
방송에서는 '안두희가 1949년 백범 암살 이후에도 음지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정권의 핵심 측근이자 정보공작원이었고, 1959년 일본 북송선 폭파 공작을 주도한 책임자였다는 사실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1955년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 육군 '308 방첩대'의 정보 보고서인 〈한국 정치사'(The History of Korea Politics)〉에 따르면, 안두희는 백범 암살 후에도 이승만 반대파 제거를 위해 헌신하는 핵심 정보공작원이었다.
당일 방송에서 이 보고서를 최초로 공개한 정병준 목포대 교수는 "이 자료는 1955년 당시 안두희가 한국에서 상당한 위상을 갖고 있었음을 방증한다"고 해석했다. 또 2001년 발굴된 미 국무성의 기밀 보고서(일명 〈실리 보고서〉)에도 안두희가 우익 테러 단체인 '백의사' 대원이자 국내에서 활동한 미군 방첩대 CIC 요원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안두희는 우익 테러단체 백의사 단원
KBS 1TV는 2020년 3월 31일 방송한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서도 '안두희, 암살 사건 후 군 복직'을 내보냈다. 이날 방송의 주된 내용은 민족의 지도자 김구를 암살하고도 이후 편안하게 지낸 안두희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였다.
방송에서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안두희가 1949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3개월 뒤 15년, 1950년 3월 10년형으로 "아주 초고속 감형"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형무소 수감자 중 15년형 이상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가운데 안두희는 참모총장 지시로 형집행정지가 되었다"라고 전했다.
▲ 백범 흉상-백범기념관 전시 |
ⓒ 정만진 |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씨는 시장에서 길이 40㎝ 정도의 박달나무 몽둥이 하나를 4천 원에 샀다. 그는 홍두깨처럼 생긴 단단한 몽둥이에 '정의봉' 세 글자를 쓴 뒤 안두희의 집을 찾아갔다. 그날 안두희는 인천 중구 신흥동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찰에 자수한 박기서씨는 "이 하늘 아래에서 안두희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면서 "안씨가 진실을 밝히지 않아 분개를 느껴 범행했다"고 밝혔다. 박기서씨는 최종심인 대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안두희는 사건 12개월 만에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 정부의 뒷배에 힘입어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그를 '처단'한 박기서는 실형 3년을 선고받았고 사건 18개월 만에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박기서는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2018년 10월 24일 박기서는 '정의봉'을 서울 용산구 소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