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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과 세종시, 그리고 노무현

  • 작성자: 정치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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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5

이해찬 의원이 2012년 총선 출마를 위해 처음 세종시(당시 연기군)에 왔을 때 거리에 붙은 현수막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종시는 노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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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원은 그 뒤로도 중요한 행사나 당 행사에서 그때의 충격과 감동에 대한 얘기하곤 했습니다. 20대 총선 출마를 준비하면서 이 의원은 이런 말로 각오를 다졌습니다.

"세종시는 노무현 대통령과 제가 기획한 도시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를 망가뜨리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이곳에 출마하게 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세상에 안 계시고 이제 제가 남아 세종시를 무한책임진다는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이해찬 의원은 노무현 정부 때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불과 53세의 나이였죠. 노무현 대통령은 이해찬 총리를 신뢰했고 '실세총리', '책임총리'라고 불릴 정도로 권한을 위임하여 국정을 이끌어갔습니다.

"노무현과 이해찬" 이 두 사람의 인연과 우정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쿨하게 출세하기" (박창식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4년)의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이해찬과 노무현의 16년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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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50대 나이이면서도 386 세대와 코드를 공유하는 개방적 면모를 보여 왔다. 인터넷 서핑도 즐긴다.
 반면에 노 대통령은 정치를 꽤 오래 했음에도 동년배 정치인들 가운데 친한 사람이 적다. 2002년 대선 당시 그는 민주당 안에서 이른바 반노 세력들한테 시달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잘 부탁한다. 도와 달라.”는 전화라도 하시라는 처방을 여러 차례 건의받고도 시원하게 응답하지 않았다. 여러 생각이 있었겠지만, ‘낯을 가리는’ 그의 독특한 성격도 한몫했다는 게 정치권의 정설이다.

 이런 가운데 이해찬은 노 대통령과 인간적으로 가까운 몇 안되는 동년배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이는 이 의원이 여섯 살 적지만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친구처럼 지내왔다고 한다. 이해찬은 아무나 하고 마당발 식으로 잘 지내는 사람이 못된다. 노 대통령도 낯을 가리는 편이다. 그런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내왔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기도 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두 사람은 16년여에 걸쳐 길고도 끈끈한 인연을 맺어왔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87년 6월 항쟁 무렵 재야단체인 민통련 활동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이해찬은 서울의 민통련 본부 정책실장이었고, 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활동을 거쳐 부산 민통련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해찬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까지는 서로 활동 지역이 달라 서로 그런 사람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지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87년 대선 뒤 정치권 진출을 결심한 민통련 활동가들의 모임에서 머리를 맞댄다. 장소는 서울 탑골공원 근처의 한 여관이었다. 
 민통련 활동가들은 이 자리에서 대부분 디제이의 평화민주당에 갈 뜻을 밝혔다. 대선 때 디제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견지했던 만큼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우리는 뜻이 같다. 그러나 나는 지역이 부산이니 YS의 통일민주당을 택해야겠다.”고 말했다. 이에 이해찬은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하시라. 그러나 뜻은 함께 하자.”고 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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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초선 국회의원 이해찬>
 두 사람은 1988년 13대 국회에 나란히 초선의원으로 진출했다. 상임위원회도 함께 노동위원회를 선택했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이어 전국 각처에서 노동자들의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지는데도, 노동 행정은 여전히 과거의 ‘노동탄압부’에서 벗어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당시 이상수 전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단연 주목을 받았다. 이해찬 · 이상수(평민당), 노무현(통일민주당) 의원 세 사람이 당이 다른데도 긴밀히 팀플레이를 벌여 정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실력을 발휘한 탓이다.
 당시 이들은 상임위 회의장 좌석이 마침 나란히 앉도록 돼 있었고 이해찬이 가운데 자리였다. 이해찬은 오른쪽에 앉은 이상수 의원이 질문을 하다 시간이 모자라면 그것을 넘겨받아 자신이 따져 나갔다. 그러고도 시간이 부족하면 남은 질의 거리를 노무현 의원에게 릴레이했다. 두 사람은 노동쟁의 현장도 자주 함께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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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의원의 보좌진도 자료를 거의 공유하다시피 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보좌진들이 거의 한 식구와 같은 팀워크를 유지해오고 있다. 이해찬 의원이 보좌관을 한 유시민은 뒷날 열린우리당 재선의원이 됐으며, 비서관을 지낸 곽해곤은 청와대 제도개선비서관을 거쳐 부동산신탁업협회 부회장으로 옮겼다. 역시 비서관을 한 정태호는 청와대 정부기획비서관이 되었다.
 당시 노무현 의원의 보좌관을 한 이호철은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했다. 비서관을 한 이광재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거쳐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됐고, 또 다른 비서관 출신인 천호선은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진출했다. 이상수 의원의 비서관을 한 이화영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됐다.

 ‘이해찬-노무현 관계’는 그 뒤로 주고받기를 거듭하며 이어진다. 13대 국회 도중 노 의원이 “제 구실도 못하는 국회의원에 회의가 든다.”며 의원직을 내던지고 잠적했다. 그러다 우물우물 국회로 복귀하면서 궁지에 몰렸을 때 이 의원이 나서 그를 적극 엄호했다.
 통일민주당에 몸담았던 노무현 의원은 1990년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에 남았다. 그리하여 디제이의 평민당과 꼬마 민주당 사이에 야당 통합 논의가 벌어졌는데, 그때 이해찬은 평민당 소장파를, 노 의원은 꼬마 민주당 개혁파를 각각 대표하면서 두 당간 물밑 논의를 주도했다. 그러다가 이해찬은 김대중한테 ‘된통’ 찍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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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14대 총선 때는 이 의원이 반동교동 깃발을 들었다가 공천 탈락 위기에 몰렸는데, 그때 노 의원이 “이해찬 같은 사람을 공천하지 않으면 나도 탈당하겠다.”고 위력시위를 해서 이해찬이 구제받기도 했다. 이해찬은 그 이전에 당의 사당화와 공천 장사 문제를 비판하면서 탈당했다가 무릎을 꿇고 복당해 주눅이 잔뜩 들어있던 무렵이었다. 노 의원은 이 무렵 디제이 민주당으로 옮긴 상태였다.
 1997년 대선 때는 김원기·노무현·원혜영·유인태 등이 몸담고 있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국민회의를 끌어들이는 문제가 있었다. 분당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차원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김대중은 이해찬을 통추와의 협상 대표로 지명했다. 이해찬은 본격적인 협상에 앞서 노무현·원혜영·유인태 등 통추의 중심적 인물들과 각각 개별적으로 만났다.
 노무현은 이해찬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물었다.
 “정권교체는 물론 필요합니다. 그런데 디제이로 당선이 된다고 봅니까?”
 캠프에서 판세분석을 담당하던 이해찬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보장은 없습니다. 박빙의 판세입니다. 그러나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야당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노 의원이나 나나 지금까지 걸어온 게 외길이었는데, 여기서 선택을 잘못하면(신한국당이나 이인제 진영, 즉 구여권행) 명분을 잃게 됩니다. 명분을 잃으면 정치를 못합니다. 디제이 진영에 합류하면 디제이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야당을 재건해 우리 세대가 주역이 되어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원칙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이 노무현이가 언제 눈앞의 이익을 보고 움직인 적이 있습니까. 원칙을 지키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이렇게 의기투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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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6대 국회 국정감사>
 1998년 이해찬은 교육부 장관이 되자 노 의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교육개혁을 하려 한다. 그러니 국회에서 뒷받침해 달라.” 이에 노 의원은 별 인연도 없던 교육위원회를 선택한다. 그리고 교원정년 단축이나 교사 촌지 파동 따위로 궁지에 몰렸던 이 장관을 노 의원은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2000년 8월 개각 때는 노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이 되는 데 이해찬이 일조했다. 개각 두어 달 전쯤 디제이를 만날 기회에 이해찬은 “노무현을 장관에 기용하면 어떠나.”며 은근히 밀었고, 이에 디제이도 “그 사람은 맡기면 잘 할 거요.”라며 동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노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이 되자 이해찬은 장관학을 전수했다. 고위직에서 사무관까지 함께 참석하는 정책토론회를 열어 중요 정책방향을 결정하는 부처 운영방식(이해찬이 교육부에서 먼저 실험했음) 따위를 노 의원에게 세세히 설명해준 것이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최소한 해당 부처 관료들 사이에선 ‘괜찮았던 역대 장관 가운데 한사람’ 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대선이 치러지기 직전인 2002년 가을에는 노 후보가 다시 이해찬을 찾았다. “대선 전략은 역시 이 의원이 맡아줘야겠다.”는 이야기였다. 이 의원은 디제이 아래서 총선기획단장, 대선기획단장 등을 여러 차례 거친, 공인된 전략통이었다. 그 무렵은 대선후보로 선출된 직후 다른 사람들을 주축으로 대선기획단을 운영해봤더니, 지지율이 신통찮아 고민이 깊을 때였다. 이 의원은 선거대책본부 기획본부장을 맡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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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초 참여정부의 첫 조각 때 노 대통령은 이 의원에게 국가정보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국정원 개혁과 함께, 아무래도 가까운 위치에서 대통령 물밑 참모장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담긴 것으로 읽혔다. 그러나 이 의원은 ‘국정원장 경력이란 게 정치를 오래 하는데 크게 도움 되는 것도 아니고······’ 라는 생각에서 고사했다고 한다. 이 의원은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직을 희망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관료 출신으로 주요 경제부처를 채운다는 원칙에 따라 반영되진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이 의원은 평균 한 달에 한 차례, 많을 때는 한 달에 두 차례씩 청와대로 불려 들어가 노 대통령과 머리를 맞댔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권 관계자는 “대통령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의견을 청취하는 대상에 이 의원이 빠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2003년 12월 노 대통령은 박봉흠 정책실장을 기용하는 등의 청와대 개편을 단행했는데, 그때도 이해찬의 조언이 한몫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 대통령은 당시 이해찬에게 의원직을 버리고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들어와 줄 뜻은 없는지를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3년 7월 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해찬은 수행 의원단의 한 사람으로 그를 따랐다. 방중 일정이 끝날 무렵 노 대통령과 장관, 의원 등 수행단이 술을 한 잔 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앞으로 장관 평가제를 도입하려고 하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이러저러하게 하고······” 라며 새로운 제도 도입에 관한 구상을 죽 설명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난 이해찬은 다른 사람들도 보는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 좋은데, 그런 세부적인 구상은 대통령보다는 밑에 부하들에게 맡기시는 게 어떤지······” 이해찬은 이런 식으로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위치였고, 노 대통령도 이를 나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해찬은 그러면서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도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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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이 각자 독특하거나 모난 성격의 소유자이면서도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데는 나름의 코드가 있는 것 같다.
 첫째로는 두 사람이 모두 재야 출신 정치인으로서 가치지향을 함께 해왔다는 점이 꼽힌다. 두 사람 모두 재야 운동가 출신으로서 ‘꿈꾸는 사회의 모습’에서 일단 대체로 일치했다.
 두 번째로는 앞서 죽 소개한 내력처럼 두 사람은 일을 함께 한 인연이 깊다. 생각이 비슷하고 함께 일할 기회도 많다면 인간관계는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둘 다 쿨하거나 드라이한 성격이면서도, 일에 관한 한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추구한다는 삶의 태도가 비슷하다는 점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노 대통령과 이해찬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두루 여러 사람을 챙기는 ‘정치권 마당발’과는 정반대의 인간형이다. 그러면서 ‘명분도 좋지만 그 명분을 어떤 방식으로 실행에 옮기는냐 하는 방법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이해찬은 바둑과 골프 등 잡기를 좀 더 즐기는 편이다. 반면에 노 대통령은 뒤늦게 골프를 배워 한때 흠뻑 빠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 중독증’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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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월드컵 응원>
 이해찬 국무총리의 전임자인 고건 전 총리는 개각 각료 제청권 행사문제를 두고 삐걱거리다가 불신을 쌓은 끝에 노 대통령과의 관계를 끝냈다. 사실 2004년 5월의 각료 제청권 파동은 노 대통령과 고 전 총리의 관계가 극히 ‘사무적’ 이었던 데서 비롯한 측면도 컸다. 즉 서로 전화를 걸어 허물없이 의견을 나눌 사이라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인데, 모양을 따지고 격 따지다 보니 오해가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핀 내력으로 보면 이해찬은 고 전 총리와 정반대 스타일의 총리 역할을 수행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2004년 7월 초 기준으로 본 것임) 필자 생각으로는 이해찬 총리 카드의 숨은 의미 중 하나가 ‘인간적으로 가까운 동료’를 기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찬은 총리 후보 지명 직후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대통령과 총리는 어차피 자주 만나게 돼있다. 청와대와 삼청동 총리 공관도 거리가 매우 가깝다.” 고 말했다. 필자는 좀 더 세월이 지난 다음에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결산해 볼 기회도 가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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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고 노무현 대통령 2주기 사진 전시회에서>
 “2002년 9월 29일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대선공약 최종 선포를 앞두고 이를 최종 검토한 5명 중에서 신행정수도 공약을 찬성한 사람은 이해찬 의원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이 의원마저 반대했다면 세종시와 전국 10개 혁신도시는 태어나지 못했다.”

 참여정부 비서실장을 지냈던 이병완 전 실장이 2015년 9월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말입니다. 
최종 공약 검토 과정에서 5명 중 과반인 3명이 반대했는데도 대선공약에 포함됐습니다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의지가 강력하게 관철된 것입니다당시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국가발전, 사회발전, 국민의 행복을 위한 의제를 제시하고 선거 과정에서 그것을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는 이슈로 만들어내고 그렇게 해서 당선하건 낙선하건 그런 논쟁을 거쳐서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니까 설혹 선거에 좀 불리할지라도 발표합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노무현과 이해찬, 이해찬과 노무현" 이 두 사람의 신념과 의지가 없었다면 세종시가 오늘날의 모습이 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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