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싶다팀이 준비 중인 선감도 선감학원 사건.
1982년까지 경기도 대부도에서 운영된 최악의 인권 유린 기관 선감학원.
경기도 안산시 대부동에 딸린 선감도는 하루 두 번 바닷길이 열려 ‘모세의 기적’이란 별칭을 가진 대부도 옆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오랜 해식작용으로 평탄한 남쪽 지형에 반해 북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형성되어 있다. 선감원은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지시 하에 바로 선감도 북쪽 당산 근처에 세워졌다.
농사지을 소수 주민을 제외한 나머지 섬주민들을 모두 강제이주시킨 뒤, 전국에서 부랑아로 지목된 10-15세 가량의 소년 수 백 명을 섬으로 잡아들였다. 부랑아들을 격리·교화시켜 사회구성원으로 재편성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소년들이 어떠한 경위로 그 곳에 잡혀갔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증언에 따르면 독립군의 자손도 선감원 수감 대상이었다고 한다.
부모가 있건 없건 일단 선감원에 온 소년들은 전역한 군인, 경찰 등으로 이뤄진 교관들의 엄격한 통제 하에 노역에 동원되었다. 학원 내에서 잘못을 한 경우 건물 아래 마련된 지하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거나 밥을 굶기는 등의 처벌을 내렸다. 대나무 끝을 뾰족하게 갈아 손톱 아래에 끼워넣는 고문을 비롯해 몰매, 배고픔을 참지 못해 탈출을 감행한 소년들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거나 갯벌을 향해 가다가 서해 특성상 강한 조류에 휩쓸려 화를 당하기 일쑤였다. 겨우 살아남은 원생들은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는 기본적인 군사훈련 과정을 거쳐 전쟁터로 내몰렸다.
여러 가지 연유로 사망한 소년들은 기관 직원들이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근처 산에 비석 하나 없이 매장되었다. 주민들의 제보에 따라 찾아간 곳에는 수풀이 우거져있어 방향을 간흠하기조차 힘들었지만 더듬어 가다 보니 오랜 세월 방치되어 확실치 않으나 어린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봉분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났다.
해방 이후 더욱 혼란해진 한국 정세 속에서 미국이 한반도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자 친일 공무원들을 고스란히 관직에 재등용함로써 과거청산의 기회를 상실했듯 선감원 역시 어린 원혼들을 위한 진상규명의 기회는 없었다. 해방 이후 ‘선감학원’으로 개칭하고 전쟁 고아들을 수용하는 사회 복지 시설로 그 역할이 바뀌었던 것이다.
선감도에 서린 과거의 참상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당시 선감원 부원장의 아들인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쓰 씨가 조국과 부친의 만행을 사죄하기 위해 쓴 <아! 선감도>란 참회소설을 발표한 데 이어 국내에서 이를 바탕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면서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금세 사라져 오늘까지 이르렀다. 증언에 따르면 몇 해 전 스까모도란 일본인이 위령탑을 세우겠다며 한동안 후원활동을 펼치고 해당 관청에서 승인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역시 유야무야되었고 과거사 진상 규명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경기도는 1954년 선감도에 주둔하던 미군의 지원을 받아 건물을 신축하고 학교와 직업보도시설도 만들었지만, 원생들의 생활은 열악했다. 억압적 규율과 굶주림, 폭력과 강제노역은 이들의 일상이었다. 운 좋은 일부 아이들은 학교도 갔지만 대부분은 염전과 농지를 개간하고, 소를 키우고 사역에 동원됐다. 매질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의 탈출이 이어졌다.
선감학원의 슬픈 역사가 생존자들에 의해 정리되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사회정화의 미명아래 '부랑아' 수용시설로 운영되었던 선감학원. 그러나 실제 부랑아는 30%에도 미치지 않고 일반 어린이들을 납치해 수용하여 염전과 잠사 축산 등 강제노역을 시켰던 시설이었다. 납치되어 수용되자마자 잔혹하게 폭행에 노출되어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릴 정도라 했고 탈출하여도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 남의 집 머슴살이로 사는 등 수천명의 어린이들의 한 생이 무너진 슬픈 역사의 한켠이다. 선감학원은 일제 식민 통치가 끝나고 한국전쟁이후 1982년도까지 납치와 강제수용을 반복했고 지금은 경기도직업훈련학교를 거쳐 경기창작센터가 들어와 있다.
수용된 원생들중 무지막지한 폭력에 맞아 죽거나 탈출하다가 익사하거나 아사 혹은 병사한 이들을 묻은 곳이 바로 선감 공동묘지이다. 묘역 현장은 아카시아와 소나무 등이 묘역 곳곳에 뿌리를 내려 어디가 묘지이고 어디가 평지인지 분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엉켜 있어 생존자들과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시설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과 끝까지 수용되어 있었던 사람들이 결성한 모임인 선감학원 생존자모임(회장 류규석)들은 약수백여기의 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감학원 희생자 공동묘지 정비를 안산시에 제기해 그중 일부인 약 300여평을 간벌 등 정비에 나섰다.
이런 인권유린의 실태는 1982년 선감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주목받지 못 했다. 정부는 선감학원을 문제아 집합시설처럼 홍보했고, 외지인들은 그대로 믿었다. 이 때문에 선감학원에서 아이가 탈출하면 주민이 나서서 신고하고 선감학원은 신고 주민에게 포상을 주었다. 선감학원 직원들이 친인척을 채용하는 관행도 입단속을 가능하게 했다. 섬 주민들은 실상을 보아도 선감학원에 반하는 언행을 할 수 없었다. 선감학원이 선감도 땅 전체를 소유했기 때문에 섬 주민들은 농사를 지어도 나무 한 그루를 베도 학원장 눈치를 봐야 했다.
지난 6월 1차 정비를 끝내고 묘역에서 나온 간벌목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오늘 있었다. 오늘도 뜨거운 때양볕아래 6~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간벌목들을 정리하는 활동을 했다. 그들의 잃어버린 청춘과 가족사는 피눈물이 나지만 먼저 희생되신 동료들의 안식을 위해 손을 걷어부친 것이다. 한 시대를 그들과 함께한 선감마을 주민들도 따뜻한 마음으로 돕고 있다고 하니 선감학원의 아픈 이야기가 세상으로 널리 알려지고 희생자 대책 논의가 활발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머지 묘역을 모두 정비하고 기념물 등 후속 정비 대책도 필요한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JTBC에서 방영됐던 선감학원.
퍼가실 경우에는 동의없는 수정은 삼가시고, 출처 URL (threppa.com/~)을 포함하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