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군 저연봉자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한 최동원과 구단들의 반격
최동원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선수회를 행동으로 옮긴 직접적 계기는 2군 선수들의 열악한 환경을 지켜보고서였다. 2006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최동원은 “2군 선수들의 연봉을 알고 깜짝 놀랐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2군 포수가 내 공을 받아준 적이 있다. 수고했다고 고기를 사줬는데 ‘얼마 만에 먹는 고기인 줄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선수 연봉이 300만 원(당시 2군 최저 연봉)이었다. 300만 원으로 야구 장비 사고, 시골에 있는 부모님께 생활비 보내드리고, 동생들 학비 대주면 남는 돈이 없다고 했다. ‘1군이든 2군이든 프로라면 최소한 생계유지는 해줘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구단은 2군 선수들을 무슨 낙오자 취급하며 머슴처럼 부렸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최고 연봉을 받는 것도, 슈퍼스타를 대접을 받는 것도 뒤에서 고생하는 동료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음지에 있는 동료들을 위해 내가 먼저 움직이겠다’고 말이다.”
고 최동원 선수는 1980년 중반 최고의 연봉을 받던 롯데의 에이스 투수였다. 최 선수는 6월항쟁 이후 사회민주화의 열기가 강했던 1988년, 열악했던 선수 복지를 개선하고자 선수협의회(선수협) 결성을 주도했다. 일종의 야구선수 노조라 할 수 있는 선수협을 꿈꾼 그는 그해 부산일보 파업 현장에 유니폼을 입고 찾아가 격려금 100만원을 쾌척하기로 했다.
최 선수는 선수연봉인상 상한제 25% 철폐와 연급제도 도임 등을 선수협의 주요 과제로 설정했다. 최 선수는 이를 위해 그해 9월 대전 유성에서 각 팀 주전선수들과 모여 인천에서 대의원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해 구단들이 와해 조작에 나서자 선수들이 동요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의원대회도 구단의 반대로 3개 구단 선수들이 불참, 결국 참석인원 20명에 불과해 정족수 미달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구단들은 선수협과 관련된 선수 20명과는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며 압박에 들어갔고 결국 선수협 출범은 무산됐다. 최동원 선수 역시 주동자로 찍혀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서 그의 야구 인생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소속구단이었던 롯데는 최 선수를 팀에서 방출했기로 결정하고 결국 삼성으로 강제 이적시켰다.
88년 11월 삼성으로 이적한 최 선수는 이후 초라한 성적으로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1989년 1승, 1990년 6승이라는 부진한 성적 끝에 32살의 젊은 나이로 은퇴했다. 앞선 롯데에서는 6년 동안 96승을 기록했던 '괴물투수'였다.
1988년, 최동원은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다. 해태 타이거즈 투수 김대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명예욕에 따른 움직임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나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해 11월 최동원은 투수 오명록, 포수 김성현과 함께 삼성 투수 김시진, 전용권, 내야수 오대석, 외야수 허규옥을 상대로 한 3:4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롯데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최동원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이드 사실보다 최동원을 힘들게 한 것은 구단이 자신의 의도를 본의와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구단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함께 선수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최동원은 1990년까지 삼성에서 뛰었고 1991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마운드를 떠났다.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아마추어 야구 시절부터 혹사 당한 게 조기 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다.
“아마추어 시절이나 프로에서 무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세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당시 선수협 법률자문을 맡았던 문재인변호사(현재 국회의원)가 사실을 나중에 트위터를 통해 알려졌다.
선수협 주동자라는 꼬리표는 은퇴 후에도 최동원 선수를 괴롭혔다. 구단 어디에서도 불려주지 않았던 최 선수는 은퇴 10년 만에서야 2000년 이광환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투수코치로 지도자 세계에 입문했다. 그후 한화 2군 감독으로 역임했고 2009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 경기운영위원으로 일했다.
※마빈 밀러와 미국 프로야구 선수노조
1966년 노동경제학자 출신으로 자동차부문 산업노조에서 단체협상 실무를 쌓아온 마빈 밀러(Marvin Miller)가 선수협 수석 고문을 맡으면서 크게 변화했다. 경영진을 생리를 꿰뚫으며 산업노조 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뒀던 밀러는 구단과 대등한 화력의 무기를 갖추지 않고서는 협상에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무기는 노동법에서 구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수협회를 법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조합으로 전환해야만 구단에 애걸복걸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역설했다. 미국 사회의 어느 업종을 둘러봐도 보수와 노동조건을 협상하면서 야구선수들처럼 저자세를 취하는 데는 없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마빈 밀러의 설득과 선수들의 결의가 합쳐진 이후의 사태 전개는 미국 야구계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로 나타났다. 1967년 사상 처음으로 단체협상이란 것이 이뤄졌다. 그 결과 ‘선수 협약’(players agreement)이 마련됐고, 실제로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을 7,000달러에서 1만 달러로 올려놓기도 했다. 그 외에도 구단측이 협약을 어겼을 경우 적법한 고충처리 절차도 마련했고, 2년 협약 유효기간 중에는 연봉조정 원칙을 변경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은 노동협상 전문가 마빈 밀러의 도움으로 그들이 직접 참여하고 운영하는 결사체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와 복지를 온전히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2015년 선수협회
퍼가실 경우에는 동의없는 수정은 삼가시고, 출처 URL (threppa.com/~)을 포함하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