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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타이타닉호의 무서운 음모론

  • 작성자: 미스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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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12.26

 

<출항 전의 타이타닉호 모습>

 

전체길이 268.8m, 46,328톤의 무게, 300만 개의 리벳으로 선체에 부착된 견고한 2,000장의 철판, 15개의 침수 차단벽을 포함한 최신 안전 기술, 건조 과정에서 생긴 여덟 명의 사망자, 1등실에 만들어진 스위트룸과 증기 목욕탕, 약 천만 원에 육박하는 당시 1등실의 탑승요금(60파운드), 가장 저렴한 3등실의 2파운드에 다하는 편도가격 (당시 막일을 하는 인부의 2주 임금), 그리고 자신감을 보여주는 총인원의 절반밖에 태울 수 없는 20척의 구명정으로 3년간의 제조과정 후 탄생한 세계최대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는 '신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는 카피를 내세워 언론으로부터 '불침선'이라는 칭송과 함께 많은 부유층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그리고 1912년 4월 10일, 드디어 영국의 사우샘프턴에서 이 불침선은 첫 항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타이타닉호의 제조사였던 화이트 스타라인의 최고참이었던 에드워드 스미스가 배의 선장을 맡았고 1등실 324명, 2등실 285명, 3등실 708명, 그리고 선장을 포함한 891명의 승무원이 탑승해 총 정원 3,547명 중 2,223명을 태우고 프랑스의 셰르부르와 아일랜드의 퀸즈타운, 그리고 미국의 뉴욕을 향해 출항합니다.

 

 

 

출항 당시부터 관측을 위한 쌍안경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는 등 자잘한 문제가 있던 타이타닉호는 항해 3일째에 W 저탄고에서 12일 정도 유지될 화재가 발생해 진압에도 불구 현재 시세로 2억 달러에 해당하는 손해를 안게 되었으며,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떠다닌다는 무선통신을 통한 소식과 4월 14일에 6통에 달하는 빙산 경고를 받지만 당시 승객들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던 무전사 존 필립스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반응을 보내 결론적으로 당시 경고를 보낸 항해 중이던 캘리포니안호의 통신사 에반스가 화를 내고는 자 버리게 되는 일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인 밤 11시 40분, 쌍안경이 없어 육안으로 망을 보던 망지기 프레드릭 플리트는 전방 450미터에 높이 20미터 미만의 빙산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이어 그는 무전을 쳤고, 이를 받은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가 일등 항해사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에게 보고를 하자 그는 바로 우측으로 키를 돌릴 것을 명령합니다. (당시 왼쪽으로 항로를 변경해야 했기에 오른쪽으로 키를 돌려야 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천천히 왼쪽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기관실에서는 동력을 끊으려 노력했지만, 당시 속도를 멈추려면 적어도 800m는 필요했기에 상황은 이미 절망적이었습니다.

 

 

결국, 타이타닉호의 우현이 높이 18미터, 그리고 타이타닉의 6배에 해당하는 30만 톤의 빙산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배의 아래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껴 잠에서 깨어났지만 위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만을 느꼈고, 승객들은 대체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일러실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충돌로 말미암은 피해를 최초로 목격한 화부 프레드 바렛은 바닷물이 폭포처럼 선체로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고, 당시 충돌로 잠에서 깬 스미스 선장은 11시 48분경 조타실로 향하다 난간 너머로 겨우 10분 만에 선수에 4.5m의 물이 찬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12시 정각 조타실에서 다섯 구획이 침수됐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받은 스미스 선장은 20척의 구명정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고, 기관실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침수를 늦추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던 승객들은 어떠한 소란이나 동요도 없이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라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배가 침수하기 전까지 근처를 지나갈 배에게 구조요청을 해 구명정으로 구조하지 못할 나머지 1,500명가량의 승객과 승무원을 구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선장은 무전실로 가 존에게 구조요청을 지시하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던(불과 20km 정도의 거리에 정박 중이었던) 캘리포니안호에선 당연히 응답이 없었으며 93km나 떨어져 있어 최고 속도로 4시간이나 걸리는 카르파티아 호에서 12시 25분경 응답을 받게 됩니다.

 

 

한편, 바닷물은 펌프의 한계를 넘어 우편실을 삼켰으며 기관실에서는 펌프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곧 차단벽이 떨어져 나가는 등 상황은 점점 절망적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12시 40분경 승객들이 갑판으로 이동하는 동안 첫 번째 구명정이 내려가고, 65인승인 구명정에 우선으로 탑승하라는 지시에 마지못해 하던 여성과 아이들 때문에 28명만이 오르게 됩니다. 

 

그 시각 선장은 10km 밖에서 지나가는 배의 불빛을 발견해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즉시 조명신호를 지시하였으며, 무전실에서는 존 필립스와 그의 조수 해롤드 브라이드가 계속해서 구조신호를 보내지만 아무런 답신도 없는 선박은 희망의 불빛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빙산과 충돌한 지 1시간 50분 뒤인 새벽 1시 30분, 우편물을 수거하던 직원 다섯 명이 익사하며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고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 승객들은 동요하며 모두 구명정으로 향하지만 목숨이 달린 순간에도 그들은 아이들과 여성을 우선하여 구명정에 태우는 놀라운 기사도를 발휘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승무원이 빈 총으로 위협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시 45분 승무원들이 마지막 구명정을 내리게 되었고 갑판에 남아 있던 1,500명 이상의 사람들은 선수가 깊이 침몰하자

선미를 향해 필사적으로 뛰게 되지만 빙산과의 충돌 2시간 40분 후 동력이 나가고 조명도 꺼진 타이타닉호와 함께 남겨진 남자들과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승무원들은 구명정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라앉고 맙니다.

 

 

그리고 새벽 4시 30분경에 도착한 카르파티아호에 의해 생존자들이 구조됩니다.

 

이후 사고 다음 주에 시행된 영국의 런던과 미국의 뉴욕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41,000개의 질문이 오갔지만, 두 청문회 모두 타이타닉호 참사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서운 음모론들

 

 

Jesuit(예수회)이 침몰시킨 타이타닉호

 

 

1830년대 초반 이후 미국은 중앙은행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연방준비은행(FRB)이라는 민간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당시 영국과 유럽 금융계를 장악했던 로스차일드가의 폴 워버그, 록펠러 금융제국의 넬슨 알드리히, 프랭크 밴더립, J.P 모건사의 헨리 데이비슨, 찰스 노튼, 벤자민 스트롱, 이 예수회에 소속된 6명의 남자가 1910년 조지아해 연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제킬섬에 모이게 됩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폴 워버그, 넬슨 알드리히, 프랭크 밴더립,

J.P 모건사의 헨리 데이비슨, 찰스 노튼, 벤자민 스트롱>

 

그들은 당시 유럽은행을 장악한 데 이어 예수회에 소속된 유대인 자본가들이 민간자본으로 미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해 누구의 간섭도 없이 무한한 자금을 공급받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계획에 당시 최초의 백만장자이자 세계제일의 거부로 불리던 존 제이콥 아스트로의 자손인 존 제이콥 아스트로 IV역시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 뉴욕의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던 이사도라 스트라우스와 같은 돈과 영향력 모두를 가진 몇몇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 상태였습니다.

 

<왼쪽부터 구겐하임, 아스트로, 스트라우스 부부>

 

이때 화이트 스타라인사를 소유하고 있던 J. P 모건은 타이타닉호에 이들 유대인 거부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출항식에 초대했으며, (당시 이들이 보유했던 재산의 가치가 지금의 10조를 넘어간다고 합니다) 같이 승선하기로 했던 J. P. 모건과 예수회 소속 자본가들은 갑작스레 승선을 취소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수년간 예수회였던 J. P. 모건을 위해 일함과 함께 예수회를 돕는 세속 동조자이자 성직자는 아니었으나 예수회의 임시 보좌주교였던 에드워드 스미스가 배의 선장을 맡게 됩니다.

 

이후 탑승하고 있던 당시 휴가 중인 아일랜드의 가장 막강한 예수회원이자 로마 예수회 고위층과 직접 선이 닿는 프란시스 부라우니 신부가 갑판에서 스미스 선장에게 예수회의 명령을 하달하고는 다음날 아일랜드 퀸스타운 해변에 마지막 정박을 한 타이타닉호에서 뉴욕까지 여행할 수 있는 뱃삯을 내겠다고 제안한 부유한 미국인의 호의를 거절하고는 하선하기에 이릅니다.

 

 

<프란시스 브라우니 신부와 타이타닉호에서 그가 찍은 맨 우측의 스미스 선장>

 

한편, 달도 없는 밤을 쌍안경도 없이 망루에서 육안으로 관측했던 망지기들을 모를 리 없던 스미스 선장은 그날 받았던 다섯 건의 빙산 경고를 무시한 채 마치 순교를 결심한 듯 지뢰밭과 같은 빙산지대를 당시 타이타닉호의 전속력이었던 22노트로 전진시킵니다.

 

결국, 24년간을 항해했던 바닷길에서 마치 지뢰밭에서 뛰는 것과 같은 항해술을 보여주며 거대한 빙산과 충돌하기에 이르고 구명정을 내려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명령을 기다리는 조수들에게 화이트 스타라인의 최고참 답지 않게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인 끝에야 구명정을 내리도록 지시합니다.

 

또, 근처를 지나가는 화물선들게 조난을 알리기 위해 붉은색의 조명탄을 쏘아 올려야 했지만, 당시 타이타닉호에 있던 세 개의 조명탄은 모두 백색이었으며 할 수 없이 쏜 이 조명탄은 마치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를 자축하는 기념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상황이 연출되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회의 바람대로 그들의 계획을 탐탐 치 않게 여겼던 거부들 모두와 심지어 당시 탑승해있던 일반시민과 교인들까지도 타이타닉호와 함께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되었고 록펠러 금융제국의 넬슨 알드리히가 상원의원의 의장직을 맡던 1913년 법안이 통과되며 정치권과 재무장관,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그 어떤 이의 간섭과 명령도 받지 않는 초 국가단체이자 개인회사인 연방준비은행이 탄생하게 됩니다.

 

<미국 내 통용되는 지폐 발권은행인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그렇다면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 음모론은 어느 정도의 견고한 진실을 포함하고 있을까요?

 

어쨌든 이후 미국 경제공황의 확산을 저지하는 자금력을 보여주는 J. P. 모건, 석유왕이 되는 록펠러,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 되는 로스차일드가는 계속해서 부흥의 길을 걷게 됩니다.

 

 

독일 잠수함 관련 음모론

 

 

침몰 후 첫 구명정이 내려가면서 절망에 빠지게 되는 스미스 선장과 선원들에게 불과 10km 떨어진 곳에서 배의 불빛을 발견해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조명신호와 구조신호를 보내지만 아무런 답신도 없는 선박은 희망의 불빛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으며, 구명정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근처를 지나는 배의 탐조등을 봤다고 주장을 하며 당시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던 캘리포니안호였을 거라는 이야기에 16km 내에 정체불명의 배가 새벽 2시까지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캘리포니안호의 삼등 항해사 그로브스와 갑판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특히, 캘리포니안호의 로드 선장은 죽을 때까지 당시 이 정체불명의 배를 타이타닉호가 아니었으며 타이타닉호와 자신의 배 사이에 또 다른 배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당시 캘리포니안호의 선장이었던 로드>

 

또, 청문회에서 질문받은 타이타닉호의 일부 선원들과 승객들이 빙산에 부딪힌 후 배 내부에서 폭발음이 들렸으며 어떤 항해사는 네 방의 포성을 들었다는 증언을 합니다.

 

그렇다면 제1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두었던 당시, U보트의 디자인을 완성한 독일 해군이 북대서양으로 U보트를 정찰하게 했으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와을 구조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들 스스로 침몰상황 자체를 만든 것은 아닐까요?

 

한편, 타이타닉호 침몰 3년 후인 1915년 독일의 U보트는 어뢰를 발사해 영국의 루시타니아호를 격침했음이 확실함에도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음모론은 단순히 당시 혼란 속에서 사실을 확대해서 받아들였던 일부 승객과 선원들의 착각이었거나, 일 때문에 업무태만을 이유로 선장의 자리를 잃게 되는 로드 선장의 책임회피성 발언이었을까요? 

 

 

J. P. 모건과 화이트 스타라인, 그리고 올림픽호

 

<화이트 스타라인사의 사장이었던 브루스 이즈메(좌)와 실질적인 오너였던 J. P. 모건(우)>

 

타이타닉호의 건조 전 화이트 스타라인사의 메인은 당시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올림피호였습니다.

 

올림픽호는 타이타닉호의 자매선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며 타이타닉호를 포함해 화이트 스타라인사의 3대 호화선으로 불리지만, 1911년 6월 첫 출항 직후의 사고와 9월 순양함 호크와 충돌로 말미암은 손상으로 11월 말까지 운행이 불가능해지는가 하면 1912년 2월 복귀와 동시에 해상에서 장애물과 충돌해 추진기가 떨어져 나가며 8개월 동안 있었던 많은 사고로 보험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막대한 수리비가 들어가게 생겼으며 설상가상으로 이틀 후에는 승객 1명이 낙하해 행방불명되는 사건으로 화이트 스타라인의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립니다.

 

또, 몇 번의 사고로 당시의 조선기술 때문에 내구성이 현격히 떨어지며 완성으로부터 1년도 채 안 돼 무보험 상태는 물론 배상 책임까지 겪으며 화이트 스타라인의 경영 부진에 일등공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화이트 스타라인의 소유주였던 J. P. 모건은, 똑같다고 할 정도로 비슷한 외관의 두 배를 이용해 고액의 보험금을 받을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좌측의 타이타닉호와 우측의 올림피호>

 

그리하여 당시 불침선으로 불리며 3년간의 건조기간이 걸린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는 출항 직전 올림픽호와 나란히 수리를 받게 되었으며, 이때 도장 부분이 서로 바뀌게 되면서 완성 당시 피로연이 있었던 타이타닉호의 창의 수와 출항했을 때의 창의 수가 다른 것, 그리고 출항 직후부터 기울고 있었던 바꿔치기 된 타이타닉호를 눈치챈 것은 극소수뿐이었습니다.

 

<타이타닉호와 올림픽호의 투샷>

 

그리고 1911년 6월, 9월, 1912년 2월 사고를 당했던 당시 올림픽호의 사고책임자였던 선장이자 알코올중독이라는 소문이 있던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항해를 남겨두었던 스미스 선장을 당당히 초호화 여객선의 첫 항해 선장으로 임명합니다.

 

당연히 승선예정이었던 모건은 병을 핑계로 타이타닉호에 승선하지 않았으며, 그의 지인들도 모두 승선 직전 취소로 배에 타지 않았습니다. (당시 모건은 타이타닉호에 승선하는 대신 이집트 여행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쌍안경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 다섯 건의 빙산 경고를 무시한 채 빙산지대를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타이타닉호는, 그러나 모건의 애초 계획이었던 빙산 출현 포인트까지 전속력으로 전진해 매수한 선원들로 빙산의 발견을 늦추어 정면충돌시킨 후(올림픽호는 빙산과 정면충돌 시 격벽에 의해 침몰하지 않는 구조였습니다) 승객과 승무원 모두 부근의 배에 전원 수용되어 인명사고 없이 보험금을 받으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맙니다.

 

바로 스미스 선장이 밤 9:20분부터 자기 방으로 인상취침에 들어가 있는 동안 11:40분 빙산이 야간에 예정 외로 출현하고 만 것입니다.

 

망지기의 보고로 급히 선회하던 타이타닉호는 결국 빙산과 정면충돌이 아닌 측면을 부딪치며 내구성이 약한 올림픽호에 침수가 시작되었으며 너무나도 빠른 2시간 반 만에 완전히 침몰하며 빙산과 격돌하지 않은 부분으로부터 두 동강 나고 맙니다.

 

그리고 당시 타이타닉호의 건조비였던 50만 파운드 보다 2배가 많은 100만 파운드의 보험금을 받은 모건은 후에 로스차일드가, 록펠러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국 굴지의 대부호가 되었으며 1920년대 후반 대공황으로 세계경제가 마비 상태에 빠져 온 세상이 불황일 때 멈추어 있던 주식시장을 운용함으로써 세계경제를 구하며 나폴레옹 3세의 출세에도 이바지하는 등 세계에서 손꼽히는 일족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여기에 타이타닉호의 자료는 설계도를 포함해 모두 사라지게 되었으며 올림픽호의 도판만이 현존하게 되었고, 사고 100년 후인 2004년 6월 미국은 손상과 약탈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타이타닉호 난파선 보호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더는 타이타닉호에 대한 조사나 유품회수를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모건의 보험금 대사기극 탓에 올림픽호가 침몰한 사건일까요? 

 

한편, 원래대로라면 이미 내구성이 떨어져 폐기되었을 올림픽호가(실제론 바꿔치기 된 타이타닉호) 23년간이나 현역으로 항해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18년에는 독일 해군의 U103과 어뢰 공격을 주고받으며 오히려 U보트를 침몰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타이타닉호의 내부와(좌) 올림픽호의 내부(우)>

 

 

그렇다면 밝혀진 담백한 진실은

 

<타니타닉호의 침몰을 조사한 브라이언 페노이어 중령>

 

이제 4백 건이 넘는 해양사고를 조사해왔던 미국 해안 경비대의 사고 조사관인 브라이언 페노이어 중령이 각계의 전문가와 실제 실험들을 통해 알아본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원인 하나 통신

당시 타이타닉호는 남부 항로 남쪽 16km 지점에 있었고 이 항로는 북부 항로보다 안전한 항로였지만 사실 따듯한 겨울 덕에 떠내려온 빙산으로 오히려 위험한 길을 건너게 돼버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빙산 때문에 캘리포니안호는 항해를 멈추고 무전사 시릴 에반스는 근처 모든 배에 경고를 보내지만, 당시 기상 정보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무전교신을 타이타닉호의 무전사 존 필립스는 깨끗이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당시 725km 떨어진 케이프 레이스에서 오는 메시지를 접수하느라 정신이 없던 존 필립스에게 민감하지 않은 장비를 사용하느라 당시의 분주한 교신 상황을 모르고 보낸, 너무 가까워서 크게 들렸던 캘리포니안호의 신호는 귀가 찢어질 정도의 소음이었을 뿐이며 다른 배에 교신을 보내야 할 때 MSG 부호를 신호 앞에 붙여야 했던 것을 빠뜨린 시릴 에반스의 교신을 분주하던 존 필립스는 당연히 무시하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재신호를 보내지 않고 무전을 끊은 시릴 에반스는 그대로 잠자리에 든 것입니다.

 

 

원인 하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

사고 당일 다섯 건의 빙산 경고를 받은 스미스 선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빙산지대를 21.5노트의 속력을 유지한 채 전력질주 하는 위험한 항해를 합니다.

 

비록 타이타닉호의 자매선 올림픽호의 선장을 맡으며 몇 번의 사고가 있었지만 화이트 스타라인사에서 24년간 선박을 맡으며 당시 모든 선박의 첫 항해를 맡고 있었던 베테랑이었던 그는 왜 이런 무모한 항해를 한 것일까요?

 

사실 당시 빙산 해역 황해도 평범한 황해에 불과했는데 베테랑인 스미스 선장은 부담을 느꼈는지 뉴욕으로 향하던 도중 안전을 위한 판단으로 빙산 해역에서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마치 지뢰밭을 빠져나가기 위해 뛰는 것처럼 배의 추진력을 높인 후 항해술을 이용해 통과하려는 과오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원인 하나 배의 속도와 기온, 그리고 어둠 속에서의 관측

당시 21노트의 속력에 영하 7도의 체감온도, 그리고 어둠 속에서 망루에 올라가 보초를 서던 레지널드와 프레드는 충돌 37초 전에서야 빙산을 발견하고 맙니다.

 

그리고 당시와 같은 환경에서 직접 실험에 나선 브라이언 페노이어 중령은 바람 때문에 눈에선 눈물이 나며 차가운 공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움과 함께 흐린 빛 속에서는 흑백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쌍안경의 유무와 관계없이 진작에 빙산을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냅니다.

 

 

원인 하나 타이타닉호의 설계

18m의 높이에 당시 타이타닉호의 6배에 해당하는 30만 톤에 육박하던 빙산이었지만, 300만 개의 리벳으로 결합한 6cm의 강철판으로 이루어진 선체는 이를 충분히 견딜 수 있었으며 16구획 중 4구획이 동시에 침수되더라도 침몰하지 않도록 설계된 배였습니다. 

 

또, 그동안 많은 이들이 주장하던 '낮은 온도에서 변했을 강철의 변화'는 회수된 잔해를 통한 분석과 실험을 통해 오히려 더욱 차가운 물에서도 어떠한 변형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결과가 낳게 됩니다.

 

건조 과정에서 거대한 리벳 머신이 사용되며 강철로 제작된 리벳이 사용된 타이타닉호는 이 거대한 장치를 앞부분으로 가져갈 수 없어서 앞부분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강철 대신 연철 리벳을 사용했으며 이는 수작업이 용이한 자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철이 강철만큼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던 건조자들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강재를 녹여 쇠에 첨가했고, 강재는 리벳 주위에 작은 조각 옷을 입히며 리벳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데 철과 강재의 비율이 정확하지 않아 강재가 많이 들어가게 된 타이타닉호의 리벳은 약해지고 맙니다.

 

결국, 타이타닉호에서 회수한 리벳을 연구해 모사품을 만들어 당시 타이타닉호에서 일어났을 충돌실험을 하자 해당 힘인 14,000파운드의 압력이 체 가해지기도 전인 10,000파운드의 압력에 모사품이 손상되기 시작했으며 분석결과 모사품보다

당시 타이타닉호에 쓰였던 리벳이 오히려 더 심각한 손상을 받았으며 균열도 더욱 컸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타이타닉호 사고에 대한 진실

1912년 4월 14일 춥고 달빛도 없는 밤을 21.5노트로 항해 중이던 타이타닉호는, 망루에서 어둠과 차가운 바람으로 시야 확보에 곤란을 겪음은 물론 캘리포니안호의 빙산 경고 신호는 조타실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충돌 직전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빙산은 타이타닉호와 충돌하면서 14,000파운드의 압력을 동체를 연결하는 리벳에 전달합니다. 

 

강재 함유량이 많던 배의 앞부분의 리벳은 그 순간 파손되어 파열된 이음매로 물이 들어와 순식간에 다섯 개 구획이 침수되고 맙니다.

 

이는 부양 한계보다 한 구획이 초과한 상황이었으며 가장 가까이 있던 캘리포니안호에 구조요청을 보내도 해당 무전사 시릴 에반스가 잠들었기 때문에 상황은 절망적으로 흐르기만 할 뿐입니다.

 

결국, 빙산과 충돌한 지 2시간 30분이 흐르고 역사상 최대의 호화 유람선이었던 타이타닉호는 허무하게 가라앉으며 1,5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고 맙니다.

 

<당시 타이타닉호와 충돌한 것으로 알려진 빙산>

 

이렇게 당시 떠있는 궁전으로 불리던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에서 일어난 처참한 비극으로 미국은 북대서양 빙산 순찰대를 조직하게 되었고, 해양 안전법도 개정돼 모든 선박은 충분한 구명정을 갖추도록 의무화했으며 무선통신 기계가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선장이자 화이트 스타라인사의 최고참이었던

에드워드 스미스는 구명정의 승선을 거부하고 끝까지 승객들을 지도한다>

 

<배의 설계자인 토마스 앤드류슨느 승객들이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돕다가

일등실 흡연실에서 조용히 자신이 설계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8명의 연주대는 배가 침몰하기 10분 전까지도

두려움에 찬 선객들을 위해 연주했으며(당시 연주한 곡으로 성가인

'우리가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와 '가을'이 유력하게 뽑히고 있다),

연주가 끝난 후 서로의 행운을 빌며 헤어지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최후를 맞이한다>

 

<토머스 바일스 사제는 기독교 성직자의 양심으로 구명정의

승선을 거절한 후 다른 사람들의 구명정 승선을 도왔으며,

구명정을 타지 못해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최후까지 갑판 위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미사를 드린다>

 

<당시 백만장자였던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자신은 살 수 없으리라 직감해 현지처와 하인을 구명정에 태운다

그리고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후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최후를 맞이한다>

 

 

<당시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던 스트라우스 노부부는,

남편인 이사도라가 구명정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아내도 승선 제의를 거절한 후

자신의 모피 코트를 하인에게 건네주고 구명정에 태운 뒤 남편과 함께 한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

 NGC 사상 최악의 참사 - 비운의 타이타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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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애니빵빵님의 댓글

  • 쓰레빠  애니빵빵
  • SNS 보내기
  • 이미 예전에 많이 돌았던 내용이네요 그래도 잘 봤습니다
0

에찌맘님의 댓글

  • 쓰레빠  에찌맘
  • SNS 보내기
  • 911과 더불어 상당히 흥미롭네요.
0

마젠터세이님의 댓글

  • 쓰레빠  마젠터세이
  • SNS 보내기
  • 이거 영상으로 본적이 있습니다. 근데 정말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앞뒤가 딱딱 맞는게... 정말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음모론중 하나였죠.
0

뭘보아님의 댓글

  • 쓰레빠  뭘보아
  • SNS 보내기
  • 사실여부를 떠나 이런 음모론 좋아합니다. ㅋㅋㅋ
0

빨쌤님의 댓글

  • 쓰레빠  빨쌤
  • SNS 보내기
  • 서프라이즈에도 한번 나왔었죠. 다시봐도 잼나네요.
0

snoppy12님의 댓글

  • 쓰레빠  snoppy12
  • SNS 보내기
  • 말로만 듣던 타이타닉 음모론을 보게 될줄이야.. ㅋㅋㅋ 잘 봤습니다.
0

청암적토마님의 댓글

  • 쓰레빠  청암적토마
  • SNS 보내기
  • 음모론으로 따지면 끝도 없지만 타이타닉의 대한 음모론은 설득력이 꽤 있어 보이긴 합니다.
1

KDOCS님의 댓글

  • 쓰레빠  KDOCS
  • SNS 보내기
  •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네요. 아직 전 음모론의 음자도 꺼내면 안될 수준인가 봅니다.
0

꼬챙이님의 댓글

  • 쓰레빠  꼬챙이
  • SNS 보내기
  • 팩트로는 타이타닉 사건 이후 록펠러 가문이 미국의 움켜잡았다는 사실이죠.
0

쐬주한잔님의 댓글

  • 쓰레빠  쐬주한잔
  • SNS 보내기
  • 갑자기 시대정신이란 다큐가 보고 싶네요.
1

패스트핸드님의 댓글

  • 쓰레빠  패스트핸드
  • SNS 보내기
  • 오~호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0

빼째닷컴님의 댓글

  • 쓰레빠  빼째닷컴
  • SNS 보내기
  • 개인적으로 음모론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음모론
0

선후우락님의 댓글

  • 쓰레빠  선후우락
  • SNS 보내기
  • 솔직히 이런 음모론을 만드는 사람이 더 신기
0

NO닉넴님의 댓글

  • 쓰레빠  NO닉넴
  • SNS 보내기
  • 어차피 구라이긴 하나 재미는 있습니다.
0

roToRldi11님의 댓글

  • 쓰레빠  roToRldi11
  • SNS 보내기
  • 벌써 영화 개봉한지가 20년 다 되어가네요. 97년도 작품이니
0

헤이브라덜님의 댓글

  • 쓰레빠  헤이브라덜
  • SNS 보내기
  •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이긴 하죠. 당시 떠오르는 미국을 먹고 싶었던 가문들이 많았으니깐요.
0

ArisCcumma님의 댓글

  • 쓰레빠  ArisCcumma
  • SNS 보내기
  • 세월호가 훨씬 더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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