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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 노동자’ 첫 정년퇴임…“나도 전문직” 하영숙의 긍지

  • 작성자: 화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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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735
  • 2022.10.09
경력단절 뒤, 내가 배운 게 쓸모없어졌더라


“고향이 경남 창녕인데, 할머니가 깨어 있는 분이에요. 그 시절에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저 국민학교 졸업하고 시골에서 부산으로 유학을 갔죠. 오빠랑 언니도 먼저 가 있었고. 그때는 할머니가 먼 데를 보내니까, 할머니 밉다고 막 울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가 참 고맙지.”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우리가 주산, 부기 세대잖아요.” 회계를 배워 사무직 경리로 취업하는 것이 여자 직업으로 선호되던 시절이었다. 영숙씨도 서울의 한 직장에서 9년을 일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때는 학교 선생님들 아니면 결혼하고 직장을 계속 다닐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자녀들이 어느 정도 크면 다시 일할 생각이었다. 첫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급식을 시작했다. 1996년이었다. 아이들 도시락을 쌀 필요가 없게 되자, 영숙씨는 직장을 구하러 나갔다.

“주산도 잘하고, 암산도 되고, 텔렉스(전화망을 이용해 텍스트를 교환하는 장치)도 배우고. 나는 내가 일을 참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일을 구하려니 그동안 배웠던 게 소용없는 거예요. 다 디지털로 바뀌고.”

10여 년 공백 앞에 자신은 “밥하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때 동네 인근에 세워진 임대주택 단지에 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그곳 급식실에서 조리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때는 급식실 일이 험하다고 다들 가지 말라고 했어요. 지금보다 급여도 대우도 낮았거든. 그래도 우리 애들 학교 노는 날 내 직장도 놀고, 애들 학교 끝나는 시간이랑 퇴근하는 시간이 같고. 딱 좋지 않냐고 하며 들어갔어요.”

배우고, 또 배웠다


힘들었다. 학생이 2천 명에 달했다.

“처음에는 큰 고무다라이에 쌀을 가득 부어서 다라이 세 개를 씻었어요. 40㎏. 이렇게 120㎏ 쌀을 매일 씻었나봐요. 밥만 한 40판(대형밥솥인 취반기의 한 칸을 ‘1판’이라고 함)을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정작 힘든 건 사람과의 관계. “내가 마흔 갓 넘어 급식실에 들어갔어요. 다들 그 나이 또래였어요.” 급식실 근무자가 8명인데, 많이들 싸웠다. 각자 살림해온 방식을 앞세워 ‘네가 옳으냐, 내가 옳다’로 소란스러웠다. 20년 가까이 ‘자기 살림’을 한 사람들이다. 쌀 씻는 법조차 서로 방식이 달랐다.

급식실 영양사까지 등장하면 살림 경력과 직무 위계가 부딪친다. 이론과 실전의 싸움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은 쌀을 70g을 먹는대요. 지금도 그 숫자를 외워요.” 대학 졸업하고 자격증을 따서 영양사로 첫 부임지에 올 경우 20대 중반. 정해진 매뉴얼대로 오이 3㎝, 소금 200g 계산해 레시피를 짠다.

“채소 중에 짠기를 더 잘 흡수하는 애들이 있어요. 같은 채소라도 철에 따라 흡수 정도가 달라요. 시금치하고 콩나물이 그래요. 똑같이 소금간을 해도 싱거워요. 간이 적당한지는 눈대중으로 아는 거예요. 애가 풀이 죽었네. 소금이 더 필요하겠네. 그래서 시금치가 반찬으로 나오는 날은 영양사와 조리사들이 싸워요.”

그래도 영양사의 말을 따를 때가 많았다. 관련 분야를 더 많이 공부했다는 생각에 한 수 접었다. 1천여 명의 식단에 대한 책임감을 인정한 것이기도 했다. “저 사람은 저 분야의 전문가니까요.”

버티기만 했나, 꽹과리도 쳤다

부대끼는 시간을 거쳐 급식실 사람들과도 합이 맞아갔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한 해 지나면 학생이 100명씩 줄어 있는 거예요.” 그때마다 조리사가 한 명씩 잘렸다.

“3년이 지나니까 1년에 한 명씩 자르는 거야. 내가 그 한 명에 드나 안 드나, 피가 마르는 거야. 처음에는 일괄적으로 사표를 다 받았어요. 학교에서 사직서를 가지고 있다가 연말에 한 명을 고른다고. 내가 지금도 그 말을 잊지 않아.”

그는 못 쓴다고 버텼다. 그다음 해에는 제비뽑기를 시키더란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해.” 이번에도 안 한다고 했다. 결국 교장 눈 밖에 났다. 다음해 퇴사할 사람으로 영숙씨가 지목됐다. 가장 연차가 높다는 이유였다. 받아야 할 퇴직금이 제일 많으니 나가라고 했다.

“나보고 나가면 다른 데 채용해줄 테니까 저기 하래. 그걸 어떻게 믿냐, 안 된다. 정 그러면 학교장 도장 찍어 약속해달라 했더니 그건 못한대. 그럼 나도 못 나간다.”

8명이던 조리사가 어느새 4명으로 줄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도 남지 않겠구나 싶었다. 수소문해 노조를 찾아갔다. 그렇게 2002년 전국여성노동조합(여성노조)에 가입한다. “파업도 하고, 별거 다 했어요.” 혼자 하면 외로웠을 텐데 급식실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다. 학교는 고발 조치하겠다고 엄포를 놓더니만 결국 교장 면담 자리를 마련했다.

“여자 교장선생님이었어요. 왜 파업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교장선생님은 전문직이고 나는 나대로 여기서 전문직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각자 전문 분야의 일에 충실한 거니, 탓하지 말고 내가 파업하는 걸 이해해달라고 그랬어요.”

10년도 더 된 일이다. 하영숙씨가 급식실에서 스무 해를 머무는 동안, 5명의 교장이 정년퇴임했다.

“그 학교에서 정년퇴임한 조리사는 내가 처음이었어요.” 교장과 교직원들의 축하를 받으며 정년퇴임을 한 것이 그에겐 자부심으로 남았다.

http://naver.me/GcWgQf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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