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뉴스1) 박준배 이수민 기자 = "아들이 손톱 발톱 다 뽑혀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봤는디 잠이 오겄소?"
지난 2일 오후 광주 서구 화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오월어머니 장삼남씨(83). 그는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는 오른쪽 고막이 없어 소리를 잘 못 듣는다며 큰 목소리로 질문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40여 년 전 그날의 기억을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장씨의 5·18에 대한 기억은 여느 민주유공자와 달리 핏빛으로 물든 1980년 5월 광주가 아니라 이듬해인 1981년 2월18일부터 시작했다.
장씨를 비롯한 '오월어머니회' 회원들이 '그놈'을 처음 만난 날이다. 장씨는 5·18 광주학살 최고 책임자인 전두환을 '그놈'이라고 불렀다.
"아들내미를, 내 새끼를 그러코롬 만들어놨는디 나가 가만히 있어? 어찌 그래, 애미가…. 그놈은 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아도 씨언찮을 것인디 말도 없이 죽어부러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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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81년 2월18일 상무대 군인들과 학생들로부터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80년 5·18민주화운동이 끝나고 그해 9월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이 초도순시 차 광주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광주 서구 까치고개를 넘어 북구 유동 삼거리를 지나 금남로 전남도청에서 브리핑받는다고 했다.
장씨는 구속자 가족 모임과 함께 도청 앞에 모여 전두환을 기다렸다.
"애지중지 키운 막내아들을 그라고 맨든 놈이 감히 또 광주에 온다고 허니 그놈을 쥑이고 따라 죽든, 사죄를 받고 아들을 돌려받든 끝장을 봐야쓰겄다고 맘묵은 거지."
한 어머니는 아이 기저귀 가방 안에 '사형수를 없애주세요' '구속자를 석방해주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담고 있었다.
금남로 도로에는 동원된 공무원을 비롯한 시민들이 길게 늘어서 환영 행사를 하고 있었다. 경비는 삼엄했다.
멀리서 경호 차량 1대가 앞장서고 뒤이어 전씨가 탄 차량이 들어섰다. 가족들은 플래카드를 꺼내 들었으나 곧바로 경호원들과 형사들에게 빼앗겼다.
플래카드가 막힌 가족들은 동시에 전씨의 차량 앞으로 뛰어들었다. 가족들이 뛰어들자 차 안에 있던 전두환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가족들의 손을 잡았다.
"전두환이 환영 인파인 줄 알고 손을 내밀드라고. 우리 가족들이 차 앞으로 뛰어가 드러눕고 차를 막아선께 그제야 차량이 후진하기 시작해. '전두환 이 살인마야. 내 아들 돌려줘'라고 소리질렀제."
순식간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현장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무장한 경호원들은 곧바로 권총을 꺼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아직도 안 잊혀져. 아들 돌려주라고 한디 경호원들이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드라고. '철커덕' '철커덕'. 그 순간 시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보호항께 총을 쏘지는 못했제."
전씨는 차량을 돌려 전남도청으로 들어갔고 가족들은 전남도청 앞에서 전두환을 만나게 해달라고 농성했다.
시민들이 도청 안으로 들어오는 걸 우려했던 신군부는 가족들만 들어오게 했다. 모두 13~4명 정도가 도청에 들어가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전남부지사 등을 만나 입장을 전달했다.
전두환은 만나지 못했지만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간 가족들은 이후 별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문제는 가족들 중 미처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5명이었다. 여자 4명과 남자 1명, 장삼남씨도 그중 1명이었다. 이들은 수갑을 찬 채 동부경찰서에 끌려갔다. 장씨는 도청 밖에 있던 가족들이 주동자로 몰려 '죽도록' 맞았다고 했다.
"'야 이 X아, 우리 행님이 내려오신디 차를 잡고 흔들어야' 함시로 군인들에게 귓방망이를 맞아서 고막 한쪽이 나갔제. 난중에는 곤봉으로 때린디 2대, 3대 맞을 때는 눈에서 불이 번뜩번뜩 났는디 그 뒤로는 한나도 안 아퍼. 밤새 맞았지."
장씨가 경찰에 끌려가 폭행 당한 뒤 병원에서 촬영해둔 사진. 목과 어깨 부근에 붉은 멍이 들어있다. (장삼남씨 제공) 2022.9.4/뉴스1
밤새 이어진 폭행 후 신군부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김대중씨가 도움 줘서, 시켜서 했다는 말을 허라는 거여. 그래서 우리는 그거시 아니다, 누가 시켜서 헌 것도 아니고 도움 받지도 않았다, 내 새끼 구할라고 한 거다라고 했고."
결국 풀려났지만 죽도록 맞은 장씨는 부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나중에 5·18 유공자가 됐다.
장씨는 이후 40여년을 오월을 위해 살았다. 아들은 몇 년 뒤 가석방됐지만 다리를 절고 손을 떠는 등 여러 후유증에 시달렸다.
1990년 정부는 5·18 피해자를 '민주유공자'로 지정하며 일시 보상금을 지급했다. 당시 아들 박철씨는 장애 7급에 8000만원을, 장씨는 14급에 3500만원을 받았다.
'인생'을 통째로 잃어버린 모자에 대한 보상금치고는 너무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올해 환갑을 맞은 아들은 아직도 술을 마시고 울면서 전화해 "엄마, 나 아파 죽겠어"라며 고통을 호소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덜 보고 매달 연금이 얼마썩 나오냐고 한디 그런 거 없어. 그때 그거 주고 끝이여. 유공자라고 해봐야 교통카드 한나 주는거 말고는 한나도 없어."
아들의 석방을 위해, 명예 회복을 위해 오월어머니회 활동을 했던 그가 여전히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하나다. 이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얘기하고 싶어서다.
"나쁜 놈들이 우리 5·18을 북한군, 폭도들에 의한 난동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분해 죽겄어. 나는 엄마잖어. 어찌 내 아들을 그렇게 만드는 걸 가만히 둬? 전두환 그놈은 사죄 한마디 없이 죽었는디 난 여전히 그날에 살아…. 나 어미 노릇 한번만 제대로 하게 사과받었으믄 좋컸는디. 인자 누구한테 사죄를 받어야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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