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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 작성자: vodaf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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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06
1.pn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이탈리아의 지역별 1인당 GDP(GRDP).

이 지도만 보더라도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의 경계가 대략 어디쯤인지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2.pn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1494년 이탈리아의 판도. 이 시기의 판도는 이후 300년간 대격변없이 유지되었다.



17세기 말부터 유럽에는 여행 열풍이 불었다. 대부분 태어나고 자란 지역을 평생 벗어나볼 생각도 하지 않던 유럽 사람들이 이제는 먼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는 것이다. 특히 영국과 독일의 귀족 출신 젊은이들이 유럽은 물론 근동 지역까지 유행처럼 여행을 떠났는데, 이를 이르는 말이 '그랜드 투어'다.

 '그랜드 투어'에서 가장 선호된 여행지는 두말할 것 없이 유럽 사람들에게 르네상스의 조국이자 카톨릭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였다. 거장의 걸작을 직접 느껴보고자 했던 예술가들, 연구 자료를 찾고자 했던 인문주의자들, 영혼의 구원을 갈구하는 독실한 카톨릭 순례자들은 모두 간절히 이탈리아 여행을 꿈꿨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여행자들은 손에 가이드북을 들고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기행문을 읽었다. 또는 '치체로네(cicerone)'라 불리는 현지 가이드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돈 많은 귀족들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서 마차, 하인, 가이드, 숙소 일체를 제공하는 현대적 의미의 '패키지여행'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던 18세기 유럽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한 도시는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였다. 18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간 여행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후 여행자들은 로마 여행을 마친 뒤 이탈리아 남단까지 내려가기 시작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 무엇보다 기원후 1세기 나폴리 인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고대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발굴이 1748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 이 시대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울러 이들은 나폴리에 도착하자마자 도시 탐방은 뒷전이고 여전히 불길을 내뿜고 있던 베수비오 화산부터 몇 차례씩 오르곤 했다.


 

나폴리에서_본_베수비오.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나폴리에서 바라본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 

 

 

 

남부 이탈리아에 발을 딛은 관광객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랄랑드는 "어느 쪽에서 바라보든 나폴리보다 더 아름답고, 더 대단하고, 더 화려하고, 더 특이한 곳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훗날 루브르 박물관의 책임자가 된 비방 드농은 "바다, 평원, 산으로 이어지는 풍광은 기가 막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풍요롭고, 아름답고 또 엄청난 정경들이 항상 푸른 하늘과 온화한 기후와 어울리니, 나폴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도시 중 하나"라며 극찬하였다.

여행객들이 나폴리 왕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취해 도시에 들어섰을 때, 그들이 느꼈던 쾌적함은 이내 불쾌감으로 바뀌고 만다. 그토록 훌륭한 자연에서 살아가는 나폴리 국민은 하나같이 사기꾼에다, 우둔하고 무지하며, 걸핏하면 싸우기를 일삼는 것처럼 보였다. 여행객들은 이렇게 비옥한 나라에 사는 수많은 하층민들이 아무 일도 않고 빈둥거리고 있다는 데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18세기의 많은 여행자들은 나폴리 사람들을 경멸하고, 심지어 증오하기까지 한다.


 


나폴리_시장거리.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나폴리의 시장거리」, 바이에른 국립미술관 소장


프랑스의 극작가인 메르빌은 나폴리를 한마디로 "악마들이 사는 천국"이라고 못 박았으며, 다른 작가인 사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에 가장 멍청한 인류가 사는 곳"이라고 폄하했다. 다른 관광객들이 내린 평가도 비슷한 것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나폴리인들의 빈곤과 천박함의 원인을 문화적, 심지어는 인종적 결함에서 찾고자 하였다.



비운의 역사 : 남부 이탈리아는 왜 가난할까?


이탈리아에는 Campania Felix(축복받은 캄파니아)라는 관용어가 있다. 이는 풍요롭고 온화한 캄파니아 지방의 자연을 찬양하는 관용어이지만, 엄연히 캄파니아 지방만이 이런 기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더 남쪽의 시칠리아, 풀리아는 고래로부터 곡창지대로 명성을 떨쳤으며 칼라브리아의 와인은 최고의 와인 중 하나로 꼽힌다. 즉, 남부 이탈리아 내 다른 지방의 기후 또한 충분히 '축복받은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이 보고 감탄한 남이탈리아의 자연은 독특한 것으로, 이 지방에는 그 유명한 베수비우스(Vesuvius) 산을 비롯한 화산들이 곳곳에 솟아 있었다. 오랜기간동안 진행된 화산들의 활동으로 인해 화산재 성분을 가진 검은 속돌들이 대지에 깔려 토양은 비옥했고, 기후도 작물의 재배에 이상적이었다. 모든 작물이 잘 자라는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고대시대에도 이모작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로 이 지방에 발을 디딘 '외세'는 그리스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인구 과밀로 인해 여러 문제가 만연한 본토를 떠나 남이탈리아의 해안가에 정착하였는데, 고대 로마인들은 이렇게 그리스화된 남이탈리아의 해안지방을 대(大)그리스라는 의미의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라고 불렀다.


 


Magna_Graecia.pn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마그나 그라이키아' 지방에 정착한 그리스 도시들이 본토의 도시들을 능가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시라쿠사, 네아폴리스, 쿠마이 등 기라성같은 폴리스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이들의 명성은 이미 그리스 본토에도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에피로스의 왕인 피로스는 반도 남단의 최대도시인 타란타스(타렌툼)를 존경해서 로마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자원의 역설?

그러나 (흡사 16세기의 이탈리아처럼)풍요롭지만 정치적으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 마그나 그라이키아는 주변 세력의 각축장이 되기 좋은 무대였다. 반도 남단의 지배권을 두고 그리스 본토세력과 싸워 승리한 로마는 이내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탐했고, 결국 전통적으로 이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카르타고까지 물리쳐 남이탈리아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로마가 멸망하자 게르만족들이 들어와 발을 붙였고, 이에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고토를 수복한다는 명목으로 비잔틴인들이 상륙해 이 지방을 장악하였다. 

남부 이탈리아는 이처럼 만성적으로 다양한 색깔을 가진 외부세력들의 지배하에 놓였는데, 이들 외세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노린 이유는 남부 이탈리아가 보유하고 있는 풍요로운 자원 때문이었다. 만약 이 지역이 불모지였다면 이렇게 많은 정복자들을 유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이탈리아처럼 될 가능성은 없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이다. 중세 중간기 지중해에서 가장 유력한 해상세력이 북부가 아닌 남부 이탈리아에 존재했기 때문인데, 아말피(Amalfi)가 바로 그것이었다.


 


Amalfi.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아말피(Amalfi)는 중세 중간기 서구권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세력이었다. 단순한 관광지 중 하나로 전락한 현대 아말피의 인구는 천년전 전성기 아말피 인구규모의 1/10에도 못 미치고 있다.



아말피는 유럽의 소위 '상업 혁명' 이전 시대에 가장 저명한 해상세력이었다. 중세 중기 지중해의 모든 항구에는 으레 아말피 상인이 존재하기 마련이었으며 이 도시의 해상법은 중세 지중해 세계의 표준 해양법률로 통했다. 이들 상인의 본거지인 아말피(Amalfi)는 전성기에 7만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던 대도시였는데, 당시 유럽에는 브뤼헤 정도를 제외하면 아말피에 견줄만한 규모의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도시는 노르만인들의 정복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노르만인은 철저한 봉건주의자들로, 그들은 상인을 경멸했고 이들의 재산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아말피인들은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노르만 왕조에 대항하여 수차례에 걸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도시가 파괴됨에 따라 지중해에서 아말피가 갖는 입지는 축소되었다. 결정적으로 1135년에 노르만인들의 동맹세력인 피사군에 의해 대대적으로 약탈당해 이는 평범한 항구로 전락하였고, 북이탈리아의 제노바, 피사 등의 신흥 상업세력이 아말피의 빈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북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수세기간 이어진 친황제파(기벨린; Ghibelline)와 친교황파(겔프; Guelph)의 치열한 대립으로 인하여 지역의 봉건 권력이 약화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권력의 공백지대에 사실상 독립국가인 자치세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이들이 상업세력화되었다. 
반대로 남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외부세력들이 정복왕조 특유의 강력한 지배력을 유지한 탓에 신흥 상업세력의 창출은 커녕 기존에 존재했던 상업세력마저도 봉건세력에 의해 싹이 잘려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봉건세력들은 귀족이 상업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초창기 북이탈리아 자치체들에서 귀족이 상업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점과 오늘날 많은 수의 학자들이 근세 영국이 (귀족의 상업활동이 금지되거나 금기시된) 대륙 유럽에 비해 상업적으로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귀족계와 상업계의 융합을 꼽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남이탈리아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북이탈리아와 다른 길을 걸었다고 해서 남이탈리아가 필연적으로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었다고 단정짓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남이탈리아는 북이탈리아와 다른 길을 걸었지만 어느 정도 그가 가진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모델?

흔히 '외세의 통치'라고 하면 악정이나 폭정을 연상하기 쉽지만, 반드시 외세의 통치가 부(負)의 유산을 남기는 것은 아니며, 역으로 풍족한 전통을 남기는 경우도 많다.

남이탈리아 또한 여러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지만 이 침략자들은 남부 사회의 성장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랍인들은 시칠리아에서 관개수로를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메밀, 면화, 사탕수수, 쟈스민, 사프란 등의 신작물을 도입하여 시칠리아의 농업을 양적, 질적으로 향상시켰다. 농업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상업과 공업의 발전도 촉진했는데, 시칠리아에서 상업의 발달은 당시 아랍인들의 상업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의 영향을 받기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랍인의 뒤를 이어 이 지역을 통치한 유럽 제일의 행정가들인 노르만인들은 (비록 상업을 말살하긴 했지만) 그들의 선진적인 행정 기법을 남이탈리아에 그대로 이식하여 시칠리아 왕국의 사회를 보다 더 효율적인 형태로 재조직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노르만 왕조의 뒤를 이은 호엔슈타우펜 왕조기에 시칠리아 왕국은 오랫동안 축적한 실력을 자양분으로 화려한 황금기의 꽃을 피우는데, 이 시기 시칠리아의 찬란한 문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왕국의 수도인 팔레르모는 유럽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이자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이 도시에서는 이탈리아 제어나 왕의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프랑스어, 이베리아어, 아랍어, 그리스어 등 지중해 세계의 모든 언어가 통용되었으며, 그만큼 다양한 지역에서 유래한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방문하여 영감을 주고 받았다. 심지어는 이슬람 학자들도 이 도시에서 상주하며 제약없이 학술활동을 하였는데, 이는 왕인 페데리코 2세(프리드리히 2세)가 카톨릭 학문 논쟁만큼이나 이슬람 학문 논쟁을 중요시하며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제적으로도 팔레르모는 유럽의 주요 무역항이자 주요 시장이었다. 일반적으로 13세기 초반 팔레르모의 인구가 10만을 넘은 것으로 보고 있다.(30만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이는 팔레르모의 배후지인 시칠리아가 윤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팔레르모 뿐만 아니라 본토의 주요 도시인 나폴리 또한 학술의 중심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다.





외국인의 경제지배

"se mala signoria, che sempre accora li popoli suggetti, non avesse mosso Palermo a gridar: Mora, Mora!"
"만약 신민을 비탄케 하는 악정이 팔레르모를 "죽여라, 죽여라!" 라는 아우성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말이오."
-단테 알리기에리(피렌체 공화국의 문호/정치인), 「신곡」中 


이탈리아 내에 시칠리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번창을 그 누구보다 아니꼽게 여기는 자가 있었다. 다름아닌 교황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여전히 각각 교황과 황제를 받드는 친교황파와 친황제파 도시 및 정치파벌들이 여전히 치열한 대외적, 혹은 도시 내에서 파벌 간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국에 교황령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칠리아 왕국을 황제를 배출한 바 있는 일가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황의 심기를 불편케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교황은 이탈리아 장홧발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전통적으로 그래왔듯 이번에도 게르만족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하기 위해 프랑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는 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남부 이탈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강역에서 제외된다.



 


Charles_I.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시칠리아 앙주 왕가의 창시자 - 카를로 1세(샤를 1세)의 석상, 나폴리 왕궁



시칠리아 앙주 왕조의 초대 왕이 된 카를로 1세(샤를 1세)는 매우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베네벤토 전쟁에서 전사한 시칠리아 국왕 만프레디의 시신을 돌무더기에 던져 버렸으며, 호엔슈타우펜의 왕가의 마지막 계승자인 콘라딘을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나폴리 광장으로 끌고가 참수해버렸다. 이는 당대 사람들 기준으로도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재미있게도 이런 그는 훗날 성자로 추앙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동생이자 앙주와 맨, 프로방스 백작령의 백작이었는데, 그가 가진 영지의 면적 총합은 시칠리아 왕국의 그것의 1/5도 안 되는 규모였다. 그러한 그가 만프레디를 꺾고 시칠리아 왕국에서 새 왕조를 수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황이 정통성을 부여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개의 왕국보다 더 비싼 금고'를 가진 (친교황파 도시)피렌체의 대은행가들이 실력을 제공해줬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가신들에게 있어서는 시칠리아 왕국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게 굴러온 엄청난 행운이었으나 카를로 1세는 이에 만족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부의 비잔티움 제국은 4차 십자군과 이의 여파로 인해 나약해져 있었다. 이에 카를로 1세는 비잔틴 제국령들을 노리고 동지중해에서 과감한 군사작전을 전개했는데, 그의 군사적 야망의 원동력은 시칠리아 왕국으로부터 각출해낸 자산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카를로 1세는 그의 치세하에서 시칠리아 왕국에서 연간 100만 플로린을 넘는 조세를 거둔 것으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반면 당시 시칠리아와 비슷한 노르만식 행정체계를 도입한 잉글랜드의 연 조세 수입은 20~25만 플로린이었으며,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거둔 조세 수입은 50만 플로린 수준이었다.(형을 뛰어넘었다!)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 사실은 13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시칠리아 왕국이 '후진 지역'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고, 두번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로 카를로 1세가 자신의 왕국을 무지막지하게 수탈했다는 사실이다.


 


Sicilian_Vespers.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프랑스 놈들을 죽여라!!"

 

1282년의 시칠리아 만종사건은 표면적으로는 프랑스인 병사의 점령군 행세에 군중들이 분개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앙주 제국'의 과잉확장을 경계한 경쟁국의 간첩들이 선동한 측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앙주 왕가의 폭정으로 인해 쌓인 신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시칠리아에서 프랑스인 임산부는 산채로 배를 갈렸고, 어린이들은 돌무더기에 내팽개쳐졌다. 이례적일 정도로 확산된 유혈극의 장에서 앙주 왕가와 가신단은 몸만 간신히 건사해 이탈리아 본토로 도주하였고, 시칠리아인들은 아라곤 연합왕국의 왕을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Two_Sicilies.gif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시칠리아 만종사건을 계기로 시칠리아 왕국은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 재위 15년간의 짧은 통합기를 제외하고, 실질적으로는 약 500년간, 공식적으로는 앙주가 시칠리아의 분할을 인정한 400년간 팔레르모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시칠리아 왕국의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으로 분할되었고, 19세기에 두 개의 시칠리아를 통합했다는 의미의 '양 시칠리아(Two Sicilies)'왕국으로 재통일된다. 나폴리의 시칠리아 왕국은 당대인과 현대인들이 편의상 '나폴리 왕국'으로 부른다.
(다만 공식명칭은 시칠리아 왕국이다)



그러나 시칠리아 만종사건으로 인해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외국인들의 수탈은 되려 강화되었다.
앙주 왕가와 앙주 제국을 발판삼아 그리스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품었던 교황은 자신들의 전략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한 아라곤의 시칠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앙주 왕가는 피렌체의 금융자본에 더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카를로 1세는 호엔슈타우펜의 시칠리아 왕국 정복전 당시 거금의 돈을 대부해 준 대가로 피렌체 상인들에게 시칠리아 왕국에서의 상업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남부 이탈리아의 상업발전에 악영향을 미쳤다. 
다만 카를로 1세 치하 때만 해도 피렌체 상인들이 왕국에서 독점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아직은 피렌체인들이 관세를 완전히 면세받지는 못했으며, 프로방스 백작이기도 한 카를로 1세가 프로방스 상인들에게도 피렌체 상인들에 준하는 상업적 접근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곤이 장악한 시칠리아의 수복을 위해 앙주는 피렌체 은행들의 자금줄에 더 의존하게 되었고, 이에 대부의 대가로 피렌체 상인들에게 무관세의 특혜를 제공하였다. 13세기 말 ~14세기에 반도 남부에서 피렌체 상인들은 왕국의 공인하에 매년 풀리아 지방의 항구에서 수만톤의 곡물들을 무관세로 피렌체로 수입했으며, 풀리아 지방에서 기근으로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상황에서조차 이 지역에서의 수만톤 규모의 곡물 유출은 지속되었다.
카를로 2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를 34년간 통치한 로베르토 국왕은 시칠리아 만종 사건 때 아라곤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고, 인질 생활을 하였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여러명의 카탈루냐인들과 친분을 맺었고, 왕이 되자 카탈루냐인들을 대거 나폴리의 궁정 요직에 앉혔다. 전통적으로 앙주 가의 왕들은 피렌체인이나 카탈루냐인들을 중용했는데, 이유는 국왕이 그들과 사적 친분관계를 가져서이기도 하지만, 남부 이탈리아의 현지 귀족들을 견제하려는 복안이 깔린 인선이기도 하였다.(시칠리아 정복전 당시 얼마나 많은 현지귀족들이 만프레디를 배반했던가!) 그러나 이들 피렌체인들과 카탈루냐인들은 철저한 한탕주의자들이었고,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폭정으로 악명을 떨쳤다.





남부 이탈리아의 스페인화

"카톨릭 국왕에게 있어 밀라노의 공산품으로부터 나오는 관세는 사카테카스나 할리스코의 귀금속 광산보다 더 가치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는 금광과 은광이 없지만 이들 지역은 제조업 덕분에 돈이  넘쳐난다."
-안토니오 세라(나폴리 왕국의 경제학자/철학자), 「국가의 부와 빈곤에 대한 짧은 논고」 中


나폴리 왕국은 쇠퇴한 앙주 가문을 축출하고 이의 왕관을 차지한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의 통치하에 재기할 가능성을 보였다.
고전학문에 후원을 하여 '관대한 자'라는 의미의 일 마그나니모(il Magnanimo)라는 별명을 얻은 알폰소 5세는 왕국을 근대 르네상스 국가로 재조직하였고, 나폴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서 다시금 이탈리아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기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베리아의 결혼'으로 아라곤의 통치권이 스페인(카스티야) 군주에게 넘어감에 따라 나폴리의 지배권에도 덩달아 변화가 생긴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16~17세기 스페인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가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를 유지,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치렀다. 16세기에 별안간 등장한  '스페인 제국'의 체제에 펀입된 나폴리 왕국이 맡은 역할은 이른바 후방 병참기지의 그것이었다. 
카톨릭 국왕이 일으킨 전쟁의 전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대신 이들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일으킨 전쟁들의 막대한 전비를 대줘야만 했다.

 

스페인 제국의 다른 주요 영지인 아라곤과 저지대의 의회는 왕의 전비를 대주는 것을 자주 거부했고, 밀라노는 유럽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왕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에 스페인 군주는 이 지역이 혼란스러워 지는 것을 염려해 밀라노에 고율의 과세를 부과하는 것을 꺼렸다. 결국 스페인 제국의 국제전략을 위한 자금의 대부분은 카스티야, 그리고 나폴리에서 충당되었는데 그 결과로 이들 지역이 빚에 억눌려버리게 되었다. 일례로 나폴리 왕국은 17세기의 '30년 전쟁' 기간동안 연 평균 80만 두카토에 상당하는 채권을 신규로 발행했는데, 이는 당시 왕국의 연 세금수입의 15~20% 수준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Francisco_de_Goya_-_Escena_de_Inquisición.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종교재판 -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재판 법정」



스페인 신권통치

스페인 본토에서 발효된 법률은 대부분 남이탈리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1492년 스페인 본토에서 발효된 알람브라 칙령은 1492년에 시칠리아에서, 그리고 1493년에 나폴리 본토에서 효력을 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악명높은 스페인 종교재판관들이 남이탈리아에 상륙하였고, 남이탈리아가 이들이 주 활동무대 중 하나가 되었다. 사실 스페인 종교재판관은 일반적 이미지와는 달리 마냥 부패하지는 않았고 나름 공정한 판결을 기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화와 경제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나폴리는 르네상스 문명에서 이탈했으며 이의 수천명의 신민들이 종교재판관들에 의해 고문당했고 일부는 처형되었다.
스페인 반종교개혁의 영향하에 남부 이탈리아는 종교계가 강력한 힘을 갖는 사회로 변모하였다.


거지들의 메트로폴리스, 나폴리

14세기 초만 해도 나폴리 시의 인구는 대략 5만명 수준이었다. 중세시대 기준으로 충분히 대도시라 할 수 있는 규모였으나 당시 인구 10만명을 헤아린 북이탈리아의 주요도시들(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제노바)에 비하면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나폴리의 인구는 30만이라는 신기원을 달성하였는데 이는 베네치아나 밀라노 인구의 2배를 넘는 것이었고, 유럽에서도 파리(인구 40만) 다음으로 가장 큰 것이었다. 어떻게 후진적인 농업국가의 도시가 이토록 세계적인 규모의 도시가 되었을까?
초창기 스페인 당국은 나폴리에서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다. 이는 많은 인력을 요구하였고, 필연적으로 많은 수의 임노동자들이 나폴리로 몰려 들었다.
사실 이 시기에 유입된 노동자 수는 '수천명'.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은 나폴리에서의 대규모 건설사업이 끝난 이후에도 그대로 눌러앉았는데 이는 나폴리 시에 있어서 문제거리가 되었다. 다른 나라였으면 성장하는 산업분야가 이들 노동력을 흡수했겠지만 왕국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나폴리에도 실크 산업이나 비누 등 일용품 산업이 존재했으나 이의 규모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부가 마냥 방치할 경우 이들은 극빈곤층으로 전락, 불만분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당국은 복지정책을 내놓았다. 먼저 이들을 위해 곡물공급을 엄격히 통제하였고, 이를 '정치 가격'에 공급하였다. 연도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나폴리에 공급된 곡물의 가격은 왕국의 시장 가격에 비해 20~50% 더 저렴했다. 1597년에는 큰 흉작으로 곡물 1토몰로(곡물단위; 약 55리터)의 시장가가 6두카토로 뛰었지만 나폴리에서는 이의 1/5인 1.2두카토의 가격에 공급되었다. 1570년대 기준으로 이와 같은 수도에서의 곡물 정치 가격을 유지하는데 연 8만 두카토 이상의 재정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폴리 정부의 부담액은 늘어난것으로 보인다.
나폴리인들의 조세부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직접세였다. 1550년에 직접세가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육박했고 이 비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떨어졌지만 훗날에도 여전히 전체 세수의 과반을 차지했다. 이 직접세의 근간을 토지세와 함께 이루는 세목은 난로세[Focatico]였다. 왕국에서 성직자, '빈곤층'과 노인, 그리고 "나폴리 시민"은 난로세 면세혜택을 누렸기 때문에, 단순히 나폴리 시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세금부담의 상당부분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Lazzaroni.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19세기 나폴리의 빈곤층, 라차로니(Lazzaroni)들



이처럼 나폴리 시민들에게는 다양한 형태의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에, 왕국에서는 그냥 나폴리에서 사는 것 자체가 왕국에서 누릴 수 있는 공식적 이권이었다. 이에 수많은 빈민들이 나폴리로 몰려들었고 도시의 인구는 폭발했다. 그러나 이 거대도시를 유지하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고, 이에 지방의 희생이 뒤따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7세기 중반 나폴리 시의 인구는 30만에 달했지만 왕국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포자(Foggia)의 인구는 2만에 못 미쳤다. 왕국의 대도시는 국가의 부와 재정의 풍족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니라, 왕국에 기생해 이의 기력을 빨아먹는 존재였던 것이다.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스페인 통치기 남이탈리아의 경제는 무작정 추락과 정체만 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에는(이 시기에는 스페인 본토의 경제도 양호한 편이었다) 농업과 제조업에서의 성장이 감지되었고 인구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제국의 부채부담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왕국의 부채도 덩달아 급증하였고, 이에 신민들의 세 부담은 무거워졌다. 1550년 133만 두카토였던 왕국의 세입은 1638년 580만 두카토로 증가하는데, 이는 물가와 인구 증가를 감안해도 세 부담이 매우 높아진 것이었다. 왕국의 부채부담은 16세기 카를 5세의 이탈리아 전쟁으로 증가한 바 있으나 16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네덜란드 독립전쟁, 30년 전쟁 등의 영향으로 왕국의 부채는 비상식적인 수준까지 급증하였다. 1575년 나폴리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왕국의 새로운 세금 도입이 신민들을 '절망에 빠뜨렸'고, 무법자로 만들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과세부담이 막중해짐에 따라 무법자들이 (특히 왕국의 남부지방에서) 도처에서 판을 친 것이다. 스페인 당국은 나폴리의 도로망 개선을 위해 투자를 경주했었으나 육로의 치안이 매우 악화되었기 때문에 왕국의 육상교통은 쇠퇴하였다. 이에 왕국은 치안 특별세를 신설하여 도적들을 격퇴하려고 노력했지만 치안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따라서 왕국의 지역간 교역은 거의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비록 바다에도 오스만 해적이나 달마치아 해적, 혹은 바다의 무법자 베네치아인들이 있었으나 육로에 비하면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지배기 남부 이탈리아는 '스페인 제국'의 막대한 전비 지출의 희생양이 되었고, 인민들은 엄청난 조세를 지불했지만 왕국의 재정지출은 언제나 수입보다 많았고 부채는 불어만갔다. 1574년에는 전체 지출의 34%가 부채상환과 이자지급에 쓰였는데, 이 비율은 1605년에 50%에 육박했고, 그 이후로는 예산의 과반이 부채를 갚는데 쓰였다. 고율의 과세정책은 인민들의 일할 의욕을 꺾었고, 교통로의 치안을 불안케 하여 교역과 제조업을 위축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세금 기반을 침식했지만 당장 부채를 갚아야하는 통치 당국은 대개 남은 세금 기반을 더 쥐어짜는 정책으로 맞대응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경제는 이러한 악순환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남부를 해방시키지 못한 남부 해방

"'남부 문제'가 갖는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다. 반도의 북부와 남부 간에는 
인간활동의 범위, 총체적 생활양식, (중략) 관습과 전통, 그리고 지적, 도덕적으로 심오한 차이가 존재한다."
-주스티노 포르투나토(이탈리아 왕국의 정치인/역사가),「남부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국가」中

19세기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이탈리아가 외세의 압력과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훗날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주도한 북이탈리아의 자유주의자들은 부르봉의 압제에 신음하는 남부의 형제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신성한 사명이라고 믿었다(최소한 겉으로는).
한편 남부(양 시칠리아 왕국)는 여전히 반동적인 전제정권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1848년에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시칠리아 혁명이 일어나 남부도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 혁명으로 일구어낸 성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수세력의 반격을 받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Landing_of_Garibaldi.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 - 가리발디의 시칠리아 상륙



그러나 서구사회 전제정의 최후 보루로 여겨졌던 이 왕국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실 이의 멸망과정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는데, 뜬금없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일개 유격대에 의해 멸망한 것이었다. 상륙 당시 1000명에 불과했던 '붉은 셔츠단'은 군율이 해이하기 그지없었던 양 시칠리아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를 장악하였다. 시칠리아 섬이 붉은 셔츠단의 손에 떨어지자 남부의 칼라브리아 주, 풀리아 주를 포함한 주들이 나폴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더기로 우루루 항복하였고 결국 이 왕국은 무너졌다.
9백만명의 신민을 거느렸던 양 시칠리아 왕국이 일개 특공대에 의해 무너진 사건은 이 왕국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서 버티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남부 사회 내부적으로는 양 시칠리아의 낡고 허약한 체제를 타파하지 못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상업을 외국인에 의해 지배당했고 중과세에 의해 산업이 질식되어 왔기 때문에 혁명의 동력, 즉 부르주아 계층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근대시대의 조류에서 남이탈리아의 운명은 현지민 스스로 개척한 것이 아니라 또다시 "외세"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본토)과 양 시칠리아 왕국의 비교


s.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북부의 오랜 상업도시 제노바는 18세기 초에도 네덜란드에 이은 제 2의 대외투자국이었다. 페르낭 브로델 같은 학자들에 의하면 제노바의 자본주의는 아예 몰락한 적이 없다고도 한다.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은 이 제노바의 자본을 종잣돈삼아 이탈리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산업화를 달성하여 리소르지멘토의 주역이 되었다. 반면 이들에 의해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된 남부 지방의 산업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으며 비교우위를 갖는 농업도 몇몇 대도시와 주요 항구의 인근 농토들을 제외하면 조방적으로 운영되었고 투자 수준도 형편없었다. 

초창기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은 영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8% 안팎의 저관세 정책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베네토 지방을 수복하고 통일을 완성한 이후 상대적으로 열강과 좋은 외교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이 줄어든 이탈리아 왕국은 유치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율을 18% 수준까지 인상하였다. 또한 로마 점령, 친독일정책, 프랑스의 튀니지 정복 등으로 인하여 전통적인 주요 무역대상국인 프랑스와 무역 전쟁까지 치렀는데 이로 인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농산물 수출업의 수지는 악화된 반면, 북부의 직물업은 번성해 양모 수요는 늘어났기에 남부의 지주들은 이제는 하나의 전통이 된 농지 인클로저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농업분야에서의 극심한 실업문제는 남부나 북부나 대동소이했지만 이는 사회의 농업 의존도가 더 높은 남부에 더 큰 문제를 야기했으며 이탈리아 정부의 농업진흥정책은 남부가 아닌 북부의 포 강 유역지대에서 우선적으로 시행되었다.


이탈리아의 지역별 산업화 지수(이탈리아 평균 = 1.00)


dkas.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안토니오 세라의 예견대로 수확체증적인 북부의 산업 경제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 반면, 농지라는 자원에 의존한 남부의 경제는 정체 내지는 더디게 성장했고, 이에 통일 이후 남부와 북부의 경제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립친스키식의 설명을 빌어 말하면, 이탈리아의 통일로 인해 북부와 남부가 '자유 무역'을 하게 되어 새로운 자유무역지대를 확보한 북부의 공업경제는 보다 더 특화되어 성장한 반면, 북부에 비해 열위에 있었던 남부의 공업경제는 되려 쇠퇴한 것이다.

이처럼 남부 이탈리아는 통일 이후에도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자화되었으며, 이 지역은 이러한 역사의 길을 밟아온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북부 산업 경제 위주의 경제 정책을 취한 것은 산업 경제의 흥성이 부국으로의 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북부 출신자들이 주도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정치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남부보다는 북부 위주의 정책을 내놓았고  남부의 경제는 북부의 그것과 판이했기 때문에 북부에게는 이익이 되는 정책이 남부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Sicily.jpg 비운의 역사 :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왜 가난할까?


시칠리아


2차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남부의 낙후된 경제 기반과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투자안을 가결했으나 아직까지도 남부와 북부는 별천지인 것으로 보인다. 남부 이탈리아는 풍요로운 자원과 축복받은 기후를 가진, '천국(Paradise)'에 비유되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에 걸친 "외세"의 지배하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이들이 남긴 부(負)의 유산을 대물림해 피폐해졌다. 그들의 역사는 그들이 비운을 선택하거나 비운이 그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인들에 비해 비운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로 '비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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