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 10일에서 1940년 6월 17일 사이에 11기의 루프트바페 소속 항공기를 격추시킵니다.
HE-111 downed by swiss Me-109's
20mm Flab Kan 37 (Oerlikon)
스위스는 개전초기 부터 월경하는 항공기에게는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헤르만 괴링의 실책과 루프트바페의 제공권 상실을 이야기할 때 곧잘 언급되는 기체 중 하나가
바로
Bf 110 Zestorer (구축기)
입니다.
1940년 6월 스위스의 대공포에 격추된
BF-110C-1
와 동일한 기체.
괴링의 기대와 관심 속에 전장에 투입되지만 장거리 중전투기라는 목적으로 생산된 기체임에도 불구하고
단발전투기와의 공중전에서는 거의 살아남기가 힘들었습니다.
폴란드 전선, 그리고 특히 영국본토항공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폭격기를 엄호하긴 커녕 자기 앞가림 하기도 벅찼으니까요.
대 프랑스전 부터 전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60기 정도의 기체를
RAF 소속의 허리케인이나 스핏파이어 또는 프랑스 공군소속의 전투기들에게 잃게됩니다.
기체의 손실율이 높아지자
2차대전 중반기 이후에는 블렌힘 같은 대 폭격기요격이나 야간전투기, 지상근접지원기 등으로 쓰이게 되죠.
그리고
다른 5기는 지금 언급하고 있는 스위스 공군과의 전투에서 격추
된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히틀러에게 단호한 입장을 내보이는 것도 포함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법 많은 수의 기체들이 국적에 상관없이 월경하면 격추되곤 했는데
이 중 특히 프랑스에 대한 폭격을 마치고 귀환하다가 피탄되거나 손상되어 낙오된
He-111 폭격기도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자국기가 중립국을 선언한 스위스 공군에게 격추당하는 일이 잦아지자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은 괴링은
그가 사랑하는 BF-110으로 구성된 제1 구축항공대를 이 지역에 파견하여 '일을 벌이려고' 작정합니다.
1940년 6월 4일에는 28기의 BF-110이 1기의 HE-111를 동반하여 스위스 국경지대를 비행시킵니다.
스위스 공군을 자극해 공중전을 유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차피 그들의 항공전력은 보잘 것이 없으니까 끌어내서 모두 파괴시키겠다는 전략
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인작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들 28대의 BF-110은 스위스 영공을 침입하고
스위스 공군은 즉각 BF-109로 구성된 편대로 이들을 요격하기 시작합니다.
한 시간쯤 계속된 공중전에서
양측 모두 1기씩
의 전투기를 잃고 전투를 중지하게 됩니다.
루프트바페는 3일 뒤에 또다시 스위스 공군의 정찰기를 격추시키고 스위스 공군을 자극하게 됩니다.
이 때는 3개의 서로 다른 편대가 방어진형을 편성,
각각 2,000미터, 4,000미터, 6,000미터 상공에서 함정을 파고 스위스 공군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오히려 스위스 공군의 BF-109 편대는 7,000미터 상공에서 이들을 발견하고 급강하하면서
(잘 아실 겁니다.
BF-109의 강하능력은 연합군기들이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는...
)
BF-110 들을 공격해오고 또다시 공중전이 벌어졌습니다.
전과 마찬가지로 스위스공군은 1기의 전투기를 잃지만
루프트바페는 4기의 전투기를 격추당하게
됩니다.
독일은 1940년 6월 5일 정식 외교라인을 가동해 항의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940년 6월 19일 확실한 위협을 담아 두번째 서한을 보내죠.
히틀러는 특히
'독일의 최신예 전투장비가 독일 조종사를 쏘아 떨어뜨리는데 이용되었다는 사실'
에 매우 격노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가 앞으로는 다르게 대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죠.
1940년 6월 20일, 스위스 공군은 스위스 영공을 침범하는 항공기 요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대신에 스위스 조종사들은 이런 항공기들을 스위스 영내 비행장에 강제착륙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대공부대는 여전히 요격에 임하죠.
히틀러는 이런 비행장을 파괴하기 위해 특수 공작원을 보내기도 합니다. 실패로 돌아가긴 하지만요.
연합국측 항공기도 전쟁기간 동안 스위스 영공을 침범했습니다.
주로 이탈리아나 독일 폭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과정
에서 말이죠.
백 대이상의 연합군 비행기들과 그 승무원들이 구금되었습니다.
스위스는 추축국들이 지배하는 영역에 외딴 섬처럼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서 연합군 폭격기들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이 당시엔 정밀폭격이란게 아예 없거나 (영국식 융단폭격) 있어도 그 정밀도가 매우 떨어졌죠.
그 중 가장 유명한 오폭은 1944년 4월 1일 스위스 북부의 작은 도시 샤프하우젠(Schaffhausen)에 대한 것이였습니다.
원래 목표는 인근의 독일 도시였는데 40명이 숨지고 50채 이상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결국 사건이 아주 나쁘게 풀려서 1944년~1945년 사이
미국과 스위스는 서로 선전포고 없이 사실상 전시상황
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희생자는 스위스 민간인 뿐만 아니라 격추되는 미군기 승무원도 포함되게 되죠.
1945년 2월엔 18명의 스위스 민간인들이 연합군 폭격기들이 Stein am Rhein, Vals, 그리고 Rafz에 투하한 폭탄에 희생됩니다.
아마도 가장 나빴던 사건은 1945년 3월 4일 Basel과 Zurich가 연합군 항공기들에 의해 폭격을 받은 일일겁니다.
Basel의 기차역에 세워져있던 여객열차를 파괴시켰죠.
다행히 희생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취리히(Zurich)에선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B-24 리버레이터를 조종하던 William Sincock 중위와 Theodore Balides 중위에 의해 폭탄이 투하되었는데
건물 2채를 대파시키고 5명의 민간인을 사망케 만듭니다.
그들은 앞선 상황과 유사하게 자신들이 독일의 도시 프라이부르크(Freiburg)를 폭격한다고 착각한 거죠.
그들은 조준하고 있던 목표물 뿐만 아니라 도시, 국가마저 놓쳐버렸던 겁니다.
스위스의 반응은 이를 '단순 사고가 아닌 중립을 깨뜨리는 명백한 전쟁행위로 간주하겠다'였습니다.
앞으로 전투기나 폭격기든 그 어떤 미군기들 모두 경고없이 요격될 거란 통보를 받게 됩니다.
실제로 23기의 항공기가 스위스 전투기에 의해 강제착륙 당합니다.
(이에 불응하는 기체는
실제로 격추
당했습니다.)
미국 정치가들과 외교관들이 일련의 사건들이 초래하는 정치적 손상을 극소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에,
일부 미군 고위 지휘관들은 좀더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몇몇은 스위스가 독일의 동조자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공격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일부 장군들은 독일군들이 스위스 영공을 날으는 미군기를 납치해 정치적 선전도구로 이용하려한다고 주장했죠.
http://en.wikipedia.org/wiki/Switzerland_during_the_World_Wars#_note-sncweb내용을 주로 참고하였으며
http://ww2aircraft.net/forum/threads/swiss-air-force.28736/
http://de.wikipedia.org/wiki/Fliegerabwehrtruppen
http://forum.axishistory.com/viewtopic.php?t=195264
그 밖에 다른 자료들도 추가해 보충했습니다.
스위스가
'로터리'
처럼 보이시나요?
프랑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며 마지노선을 믿고 있던 벨기에는 '사거리'에 가까웠습니다.
So much for the time of acute danger following the fall of France. In the following years, and especially after 1943, when Switzerland was fully surrendered by German occupation zones, the Government followed a politics of appeasement with Germany, aiming at not provoking an invasion. It was certainly a complicate relation and Switzerland profited a lot from it, making very good business with Germany: so much that, after the end of WW2, Switzerland was forced to pay war damage compensation to the USA (strange for a neutral country) because USA found that Switzerland contributed to prolong the war in Europe by the economic assistance it gave to the Third Reich. The full extent of exorbitant enrichment and human sufferings actually provoked by Switzerland is, understandably, a hot topic in the Confederation even to these days. An inquiry commission has probably put the final word to it with a colossal work of history:
이 사건 (루프트 바페의 Bf-110과 스위스공군의 Bf-109 사이의 공중전) 이후의 역사는...
(특히 1943년 이후의 스위스의 행보. 연합국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상 독일의 눈치를 살피며 항복한 거와 다름 없다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은 노르웨이와 지배는 받지 않았지만 방조에 가까웠던 스웨덴... 그 중간 쯤 될까요.
전쟁 이전 부터 독일과 스위스는 윈-윈 관계의 좋은 경제적 파트너였습니다.
히틀러가 스위스 침공계획을 포기한 것도 따지자면
동부전선의 소련군과 서부전선의 연합군 모두를 상대하기에 벅찬 탓도 있지만,
스위스의 '중립성'을 스스로 깨뜨려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겐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자금줄과 다름이 없었으니까요.
지금도 스위스 은행은 유명하지만
당시에도 (연합국 뿐만 아니라) 제3제국의 비밀금고 역할을 수행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치에 의해 제거당한 유대인 거부들의 계좌들을 몇 번의 돈세탁 후 꿀꺽하기도 하고요.
중립국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의해 종
전후
제3제국과의 이런 협력관계를 들어 전쟁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도 받게되죠.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뜨거운 논쟁거리이기도 합니다.)
샤프하우젠 오폭도 샤프하우젠에 위치한 유명한 시계 회사 IWC...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부품을 납품하는 박쥐 짓을 해서 시계 공장에 폭탄 맞았다..'라는
'카더라 통신'도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 곳을 보면19
44년 4월1일 샤프하우젠 오폭에 대한 보상금으로
미국이 스위스에 4백만달러를 그해10월에 지불했다고 나왔네요..
이후 스위스 오폭에 대한 물적, 인적 피해 보상금은 미국 정부를 통해 1949년 10월에 지불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현재 가치로 2억 달러를 상회)
많은 분들이 스위스가 연합국측보다는 추축국 측에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다고 생각하고.
나치에 동조 내지는 그 정책을 방조했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나치 정권을 연장시킨, 전쟁을 보다 오래 끌게 만든...)
당시 실제 무력충돌도 있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그와 함께 중립과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게 아니라 스스로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싶었고요.
마지막 한마디:
스위스 없으면 미국이든 독일이든 결혼할 때 롤렉스 못 받는다. 오메가도 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