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0월 23일자 조선일보에 ‘봉오동전투 등 항일 3대 대첩 기념식’이란 표제의 보도기사 한편이 실렸다. 그 중의 한 단락을 그대로 베껴보기로 하자.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독립군의 근거지인 만주 봉오동을 포위한 일본군에 맞서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명을 부상시킨 독립전사의 기념비적 전투이며 청산리전투는 같은 해 10월 일본군의 1개 여단을 사살, 일제의 잔악한 토벌작전을 붕괴시킨 계기로 기록돼 있다.”
이 기사를 읽어보고 나는 경악을 한 나머지 숨이 꽉 막혀버렸다. 그리고 잇달아서 일본국왕 히로히또의 말본새대로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명시된 바의 숫자가 너무도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 통석의 염은 곧 다시 심화(心火)로 변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숫자 유희라도 하는 것인가!’
-사살 157명
-사살 1개 여단
당시 일본 육군의 편제로 1개 여단이면 아무리 줄여도 3천명 이상이다. 그렇다면 이거 혹시 1개 여단이란 걸 1개 소대나 1개 분대쯤으로 착각을 한 게 아냐? 멀쩡한 사람들이 백주대낮에 잠꼬대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과대망상증에라도 걸렸단 말인가?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한 일이다. 과히 나무랄 것까진 없을 성 싶은 일이다. 아 왜 우린 뭐나 뻥튀기로 튀긴 것을 더 잘 먹지들 않는가. 콩도 그렇고 옥수수도 그렇고. 그냥 것보다는 아무래도 튀긴 게 더 맛있으니까. 빵도 그렇지. 팍신팍신하게 부풀리지 않으면 딱딱해서 어떻게 먹는담. 고무풍선도 공기나 수소가스 따위를 넣어서 부풀려야지. 안 그러면 홀쭉하니까 아이들이 가지고 놀지도 않지 않는가.
그러니까 사람이란 아마도 천성적으로 부풀린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러게 봉오동의 전과는 한 300배쯤, 청산리의 전과는 한 500배쯤 잔뜩 부풀려가지고 기념식장인 세종문화회관을 경축 무드로 그득히 채워놓지를 않았는가.
1995년 5월 조선의용군전사(戰史)라는 책이 서울에서 출간됐다. 나 자신은 우리가 망국민이던 세월에 청춘을 고스란히 바쳐가며 조선의용군과 그 운명을 같이 했던 터라서 그 책에 특히 농후한 흥미를 가졌다. 그리하여 반세기 전에 제가 쓴 묵은 일기장이라도 뒤져낸 듯 그윽한 향수에 잠겨가며 세세히 정독을 했다.
다 읽고 나서 나는 또 한 번 어느 놈의 말본새대로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역시 그 숫자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의 함화공작(喊話工作)에 강동해 ‘일본군 병사 200여명이 총을 버리고 참호에서 뛰어나와 투항의 백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1939년 3월경 호남성의 통성(通城)전선에서의 일이었단다.
당시 나는 분대지도원(분대장은 葉鴻德)의 신분으로 그 전역에 참전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함화공작에 감동해 총을 버리고 참호에서 뛰어나와 투항의 백기를 든 일본군 병사는 단 한 놈도 구경을 못했다.
-하느님 맙소사! 이 죄 많은 아들딸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시옵소서. 아멘
그 ‘200명 투항사건 또는 귀순사건’의 진상은 이러하다. 그 전역에서 일본군 포로 2명(상등병과 일등병)을 잡았는데 그 녀석들이 군복 호주머니에서 차곡차곡 접은 통행증 한 장씩을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이 통행증에 명시된 대로 생명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느냐”고 극히 황공스레 ‘여쭈어’보는 것이었다.
그 통행증들은 우리가 찍어서 일본군 진지에 살포를 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이 통행증을 가지고 넘어오는 일본군은 비단 생명의 안전을 보장할 뿐 아니라 특별한 우대까지 한다.’는 문구가 일어로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 경우, 단 2명의 특이할 게 하나도 없는 그저 그런 포로가 200명 투항사건 또는 귀순사건으로 둔갑을 해도 천문학적으로 둔갑을 해버린 것이다! 내가 너무 놀라 당장에 까무러쳐 뻗어버리지를 아니하고 그래도 간신히나마 목숨을 부지해가지고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다는 게, 이게 그래 천우신조가 아니고 또 무엇일 건가.
하지만 공정히 말해 이 허풍 치기 200명 귀순사건을 곧이곧대로 믿고 다루신 분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잘못은 그분들을 오도한 조선의용대 통신편집부의 황색(黃色)피부의 괴벨스들에게 있다. 그들이 항일전쟁 초기에 벌써 터무니없는 과장증에 걸려 엄숙하고 공정해야 할 역사의 기재(記載)를 함부로 주무르며 멋대로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다.
1941년 2월, 낙양에 주류(駐留)하던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서는 10여명의 대원을 서안으로 파견했다. 광복군과의 통일전선을 모색하기 위한 친선사절이었다. 나도 그 한 성원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동관(涷關) 맞은편의 풍릉도(風陵渡)까지 쳐들어와선 아군의 포격 때문에 황하를 건널 재간이 없어서 더는 침공을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대치상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죽 지속됐다.
내가 알기로는 당시 최전방에 나와 있다는 광복군 제2지대(지대장 나월환)는 그 후 서안에서 단 한 발자국도 동진(東進)을 못해보고 말았다. 서안에서 풍릉도까지는 약 150킬로미터. 그러니까 광복군은 시종 무장을 한 일본군의 낯판때기란 건 구경을 못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중국군에게 잡혀 온 포로병의 낯판때기는 더러 구경을 했을 테지만.
항일의 가지가지 신화들은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천연덕스레 꾸며진 게 아닐까. 과장법이나 뻥튀기 따위로 잘 가꾸어져 또는 지성껏 가꾸어져 마침내 백화만발을 한 게 아닐까.
서울의 보성고등학교는 나의 모교다. 그 모교가 장장 65년이란 세월이 흐른 마당에 갑작스레 나를 부르셨다. 지난 9월 21일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오신 것이다.
‘김학철 교우님께서 자랑스런 보성인으로 선정되셨음을 알립니다. 시상식은 10월 19일. 곧 초청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믐밤에 홍두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나와서 65년이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미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가 돼버린 지도 한참 됐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서울에 당도를 하고 본 즉 우리 동기생들은 나까지 모두 다섯이 겨우 남아있었다. 아마 다들 팔십 고개를 넘기가 그리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한데 여기서 골칫거리로 되는 것은 그 상패에 찍혀있는 몇 구절 ‘혁혁(赫赫)한 전과’와 ‘문단의 거봉(巨峰)’ 그리고 ‘정신적 지주’였다. 수상 소감에서 나는 솔직담백하게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상을 받기가 정말 쑥스럽습니다. 일본군에 맞서 싸우긴 싸웠지만 열 번에 아홉 번 쯤은 지는 싸움을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 어쩌다 한번 쯤 이긴다는 것도 적군을 한둘 또는 서넛 살상을 하면 아주 괜찮은 걸로 여겼습니다. 적아 400만 이상의 군대가 마구 어우러져 엎치락뒤치락 싸워대는 판에 우리 조선의용군은 총 몇 백 자루가 고작. 고걸 가지고 어떻게 큰판 싸움을 벌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새 발의 피지요. 그러게 혁혁한 전과라시는데 낯이 간지럽습니다.
우리의 항일 무장투쟁은 그 전 과정을 통해 대첩 운운하는 따위의 거창한 용어로 표현할 만한 전역을, 우리 단독으로는 애당초 치러보지를 못했습니다. 중국군에 편승하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의용군이 윷진아비마냥 자꾸 지면서도 일본군이 무조건항복을 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만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독립군의 근거지인 만주 봉오동을 포위한 일본군에 맞서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명을 부상시킨 독립전사의 기념비적 전투이며 청산리전투는 같은 해 10월 일본군의 1개 여단을 사살, 일제의 잔악한 토벌작전을 붕괴시킨 계기로 기록돼 있다.”
이 기사를 읽어보고 나는 경악을 한 나머지 숨이 꽉 막혀버렸다. 그리고 잇달아서 일본국왕 히로히또의 말본새대로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명시된 바의 숫자가 너무도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 통석의 염은 곧 다시 심화(心火)로 변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숫자 유희라도 하는 것인가!’
-사살 157명
-사살 1개 여단
당시 일본 육군의 편제로 1개 여단이면 아무리 줄여도 3천명 이상이다. 그렇다면 이거 혹시 1개 여단이란 걸 1개 소대나 1개 분대쯤으로 착각을 한 게 아냐? 멀쩡한 사람들이 백주대낮에 잠꼬대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과대망상증에라도 걸렸단 말인가?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한 일이다. 과히 나무랄 것까진 없을 성 싶은 일이다. 아 왜 우린 뭐나 뻥튀기로 튀긴 것을 더 잘 먹지들 않는가. 콩도 그렇고 옥수수도 그렇고. 그냥 것보다는 아무래도 튀긴 게 더 맛있으니까. 빵도 그렇지. 팍신팍신하게 부풀리지 않으면 딱딱해서 어떻게 먹는담. 고무풍선도 공기나 수소가스 따위를 넣어서 부풀려야지. 안 그러면 홀쭉하니까 아이들이 가지고 놀지도 않지 않는가.
그러니까 사람이란 아마도 천성적으로 부풀린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러게 봉오동의 전과는 한 300배쯤, 청산리의 전과는 한 500배쯤 잔뜩 부풀려가지고 기념식장인 세종문화회관을 경축 무드로 그득히 채워놓지를 않았는가.
1995년 5월 조선의용군전사(戰史)라는 책이 서울에서 출간됐다. 나 자신은 우리가 망국민이던 세월에 청춘을 고스란히 바쳐가며 조선의용군과 그 운명을 같이 했던 터라서 그 책에 특히 농후한 흥미를 가졌다. 그리하여 반세기 전에 제가 쓴 묵은 일기장이라도 뒤져낸 듯 그윽한 향수에 잠겨가며 세세히 정독을 했다.
다 읽고 나서 나는 또 한 번 어느 놈의 말본새대로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역시 그 숫자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의 함화공작(喊話工作)에 강동해 ‘일본군 병사 200여명이 총을 버리고 참호에서 뛰어나와 투항의 백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1939년 3월경 호남성의 통성(通城)전선에서의 일이었단다.
당시 나는 분대지도원(분대장은 葉鴻德)의 신분으로 그 전역에 참전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함화공작에 감동해 총을 버리고 참호에서 뛰어나와 투항의 백기를 든 일본군 병사는 단 한 놈도 구경을 못했다.
-하느님 맙소사! 이 죄 많은 아들딸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시옵소서. 아멘
그 ‘200명 투항사건 또는 귀순사건’의 진상은 이러하다. 그 전역에서 일본군 포로 2명(상등병과 일등병)을 잡았는데 그 녀석들이 군복 호주머니에서 차곡차곡 접은 통행증 한 장씩을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이 통행증에 명시된 대로 생명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느냐”고 극히 황공스레 ‘여쭈어’보는 것이었다.
그 통행증들은 우리가 찍어서 일본군 진지에 살포를 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이 통행증을 가지고 넘어오는 일본군은 비단 생명의 안전을 보장할 뿐 아니라 특별한 우대까지 한다.’는 문구가 일어로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 경우, 단 2명의 특이할 게 하나도 없는 그저 그런 포로가 200명 투항사건 또는 귀순사건으로 둔갑을 해도 천문학적으로 둔갑을 해버린 것이다! 내가 너무 놀라 당장에 까무러쳐 뻗어버리지를 아니하고 그래도 간신히나마 목숨을 부지해가지고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다는 게, 이게 그래 천우신조가 아니고 또 무엇일 건가.
하지만 공정히 말해 이 허풍 치기 200명 귀순사건을 곧이곧대로 믿고 다루신 분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잘못은 그분들을 오도한 조선의용대 통신편집부의 황색(黃色)피부의 괴벨스들에게 있다. 그들이 항일전쟁 초기에 벌써 터무니없는 과장증에 걸려 엄숙하고 공정해야 할 역사의 기재(記載)를 함부로 주무르며 멋대로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다.
1941년 2월, 낙양에 주류(駐留)하던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서는 10여명의 대원을 서안으로 파견했다. 광복군과의 통일전선을 모색하기 위한 친선사절이었다. 나도 그 한 성원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동관(涷關) 맞은편의 풍릉도(風陵渡)까지 쳐들어와선 아군의 포격 때문에 황하를 건널 재간이 없어서 더는 침공을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대치상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죽 지속됐다.
내가 알기로는 당시 최전방에 나와 있다는 광복군 제2지대(지대장 나월환)는 그 후 서안에서 단 한 발자국도 동진(東進)을 못해보고 말았다. 서안에서 풍릉도까지는 약 150킬로미터. 그러니까 광복군은 시종 무장을 한 일본군의 낯판때기란 건 구경을 못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중국군에게 잡혀 온 포로병의 낯판때기는 더러 구경을 했을 테지만.
항일의 가지가지 신화들은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천연덕스레 꾸며진 게 아닐까. 과장법이나 뻥튀기 따위로 잘 가꾸어져 또는 지성껏 가꾸어져 마침내 백화만발을 한 게 아닐까.
서울의 보성고등학교는 나의 모교다. 그 모교가 장장 65년이란 세월이 흐른 마당에 갑작스레 나를 부르셨다. 지난 9월 21일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오신 것이다.
‘김학철 교우님께서 자랑스런 보성인으로 선정되셨음을 알립니다. 시상식은 10월 19일. 곧 초청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믐밤에 홍두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나와서 65년이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미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가 돼버린 지도 한참 됐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서울에 당도를 하고 본 즉 우리 동기생들은 나까지 모두 다섯이 겨우 남아있었다. 아마 다들 팔십 고개를 넘기가 그리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한데 여기서 골칫거리로 되는 것은 그 상패에 찍혀있는 몇 구절 ‘혁혁(赫赫)한 전과’와 ‘문단의 거봉(巨峰)’ 그리고 ‘정신적 지주’였다. 수상 소감에서 나는 솔직담백하게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상을 받기가 정말 쑥스럽습니다. 일본군에 맞서 싸우긴 싸웠지만 열 번에 아홉 번 쯤은 지는 싸움을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 어쩌다 한번 쯤 이긴다는 것도 적군을 한둘 또는 서넛 살상을 하면 아주 괜찮은 걸로 여겼습니다. 적아 400만 이상의 군대가 마구 어우러져 엎치락뒤치락 싸워대는 판에 우리 조선의용군은 총 몇 백 자루가 고작. 고걸 가지고 어떻게 큰판 싸움을 벌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새 발의 피지요. 그러게 혁혁한 전과라시는데 낯이 간지럽습니다.
우리의 항일 무장투쟁은 그 전 과정을 통해 대첩 운운하는 따위의 거창한 용어로 표현할 만한 전역을, 우리 단독으로는 애당초 치러보지를 못했습니다. 중국군에 편승하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의용군이 윷진아비마냥 자꾸 지면서도 일본군이 무조건항복을 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만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