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해가 기울어져 가면 공연히 마음이 쓸쓸해진다. 한 장 달랑 남아 며칠 안 남은 달력을 보면 세월이 무상하다고 느낀다. 또 뭔가 할 일을 마치지 못한 듯 조급해지면서 불안해지기도 한다.
얼마전 미국에 사는 교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미국에 간 지 십 수년이 지난 사람이었다. "미국에 한번 와 봐야 합니다. 미국이 위대하다는 걸 느끼거든요." 나는 미국에 가본 일은 없지만 미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도 별로 없으니 그 위대하다는 실체가 와 닿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실제로 본 일입니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의 횡단보도였지요. 한 장애인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신호등이 바뀌도록 그 할머니는 길을 건너지 못했지요.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옮기고 있었습니다. 붉은 불이 들어왔지요. 그런데도 그 할머니는 길을 다 못건넜던 것입니다. 그러나 길 양쪽에 서 있던 차들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지요. 이윽고 할머니가 길을 다 건너자 비로소 차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교포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미국이 위대하다는 것 느꼈답니다. 어쩌다 한국에 와보면 교통에 대한 무질서는 정말 위험하다 못해 무섭더군요."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작은 일에서 미국의 위대함을 발견한다는 것도 그 교포만의 눈으로 포착한 정확한 느낌일지도 모르니까. 한국이 세계적으로 수위를 다툴 만큼 악명 높은 교통사고율이 있다는 건 부끄러워 마땅한 일이고. 그러나...
그러나 그것만으로 미국이 위대하다고 느끼는 그에게 동조할 수 없었고 나도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얘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제가 겪은 일을 얘기 하지요. 사거리를 바로 앞에 둔 아주 혼잡한 도로였답니다. 항상 차가 밀리는 곳이었는데 횡단보도도 아닌 도로 한 복판이었지요. 갑자기 도로를 가던 승용차가 서 버렸답니다. 마주오던 차도 서고 말았지요. 도로 한 복판에서 양쪽 차가 서 버렸으니 바로 앞의 사거리는 물론 뒤에 오던 차들이 순신간에 밀리고 말았지요."
나는 그 때를 다시 기억하면서 말을 이었다.
"길을 가다가 그런 상황에 눈을 돌려 도로를 보니... 도로 한복판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세요?"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뭔데요?"
"팔뚝만한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도로로 뛰어들어 우왕좌왕하고 있던 거예요. 강아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차들이 서 있는 도로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교포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놀란 강아지는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고... 난 잠시 보다가 도로로 들어가 강아지를 몰아냈지요."
도로를 벗어나 보도에 이르자마자 강아지는 쏜살같이 달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양쪽에 서 있던 차들은 그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말이죠. 화를 내는 운전자는 하나도 없었어요. 다들 웃고 가더군요. 어때요? 아름다운 얘기 아닌가요?"
"네. 그렇군요."
"한국에서도 횡단보도에서 길을 못건넌 사람 기다려주는 차들은 많답니다. 특히 장애인이나 노인 분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고요. 나는 그런 일 많이 봤어요. 그러나 혼잡한 도로 한복판에서 조그만 강아지 때문에 양쪽 차가 서 있다는 거 그리고 웃고 가는 운전자들, 나는 그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횡단보도에서 장애인 할머니를 기다려 준 차들을 보고 미국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교포에 대한 반발심리로 내가 좀 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워지면서 메말라가는 마음을 느낄 때마다 이런 따듯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있던 풍경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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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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