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전쟁은 그들이 원하는 목표를 강제하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의 병사들에게 닥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개인의 생존이다.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영화나 애국심을 잔뜩 고취하기에 바쁜 영화들은 결코 그곳에 있었던
당사자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
전쟁에서의 편가르기가 단순히 적과 아군의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멍청한 전쟁영화와 영리한 전쟁영화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본국의 지원이 줄어든 상황에서 덩케르크에 고립된 군인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친다. 배를 타고 돌아가기 위한 순서는 정해져 있지만, 그것을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군인은 죽은 영국군의 군복을 갈아입고 위장을 하고, 순번이 뒤로 밀린 이름모를 영국군과 함께 배에 몰래 타기 위해 부상병을 들것에 실어나르기도 한다. 해변가에 좌초된 배에 숨어 바닷물이 밀려들오기만을 숨죽여 기다리던 병사들은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총알세례를 받는다.
그 투쟁 속에서 우리와 그들로 나뉘고, 누군가는 소외되고 희생당한다.
동맹군과 자국군.
배에 탑승한 자와 타지 못한 자.
우리 부대와 다른 부대.
아군끼리 서로 편을 가르고 갈등하는 이유는
적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살기 위해서.'
영화는 전쟁이란 생존을 향한 수많은 이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모두 합친 것이고, 때론 적과 아군의 구분마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듯 하다. 마치 눈 앞에 보이는 조국이 그들에게 한척의 구축함만을 보낸것처럼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그들은 극한의 상황에 내던져진 경쟁자에 불과하다.
물론 영화는 냉소적인 시선만으로 일관하지는 않는다. 덩케르크와 영국 사이에 놓인 바다를 이어주는 인물들의 희생과 숭고함은 인간에 대한 한구석 희망이다. 인상깊은 점은 이러한 개인의 희생이나 숭고한 정신을 애국주의와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배를 이끌고 덩케르크로 떠난 도슨은 "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 왜 젊은이들만 총알받이 되는가?"라고 말한다. 그는 전사한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그곳에 고립되어 있을 젊은 병사들을 구하러 간 것이다.
돌아갈 연료 대신 아군을 지킨 파리어나 홀로 남아 프랑스군의 철수를 돕기로한 볼튼 사령관 역시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애국심 보다는 타인에 대한 박애에 가깝다.
덧붙여, 플롯적인 면에서 덩케르크 역시 기존의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의 특징을 띤다. 일반적인 시간순서를 따르지 않은 채,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절정으로 갈수록 맞물려가게끔 연결시키면서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구성이다. 다만 이번에는 그 디테일이 전작인 인터스텔라와 비교했을 때 많이 아쉽다. 개인적으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의 동생인 조나단 놀란이 각본으로 참여한 작품들이 좋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극의 재미 측면에서는 기대에 못미쳤지만, 전쟁영화로 포장한 액션영화가 아닌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전쟁영화를 보고 싶다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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