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의 비극, 다음 국회에서 바로잡을 수 있을까

박은하 기자

잔혹한 인권유린 등 ‘비리의 수용소’에 대한 진상규명 법안 국회서 4년간 표류

1987년 검찰수사 후 문 닫힌 형제복지원./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년 검찰수사 후 문 닫힌 형제복지원./경향신문 자료사진

“제가 19대 국회에서 가장 애쓴 것 중 하나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입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왜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게 되었을까요? 바로 ‘의심스러워서’입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부랑인으로 의심돼서 만에 하나라도 사회질서를 해칠까 의심스러워서 형제복지원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집 앞에서 놀고 있던 아이였거나 도시에 왔다 길을 잃은 지방 사람이었습니다.”(2016년 2월 27일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필리버스터 마무리 발언 중)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여전히 ‘피해자’의 지위에 머물러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배·보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난 3년간 피해 생존자들과 진선미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은 신문·방송을 통한 여론화, 진상규명법 발의, 국가기록원 자료 제출, 단식, 삭발식, 토론회, 그림 전시회, 외신과의 인터뷰, 기자회견 등 각양각색의 활동을 벌였으나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법’ 처리는 20대 국회로 넘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2014년 3월과 7월 두 번에 걸쳐 발의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법은 아직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했다. 19대 국회 회기 종료 시점인 이달 29일까지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법’의 상임위인 안전행정소위는 11일에 한 차례 남아 있다. 이날 법안이 통과돼야만 19일 전체 회의에서 다뤄질 기회라도 얻는다. 지난 2년간 상임위 심의를 넘어가지 못했으며 법안을 통과시키자는 여야 합의가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법안이 본회의에 가기도 쉽지 않고, 본회의에 가더라도 행정부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 통과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는 6일 <주간경향>과의 통화에서 “11일 회의가 있으니 기회는 남아 있는 셈이다. 아직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당내에서도 의견을 조율하는 중”이라면서도 “통과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20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해서 진상규명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이슈는 19대 국회에서는 해결이 어려워질 전망이지만 ‘국제적 이슈’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AP통신은 지난달 19일 형제복지원 사건을 상세히 다루며 ‘S. Korea covered up mass abuse, killings of vagrants’(한국이 부랑아들의 집단적 학대와 살인을 은폐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했다. AP통신은 부산 개성중 2학년이던 시절 밤 늦게 귀가하다 경찰로부터 도둑으로 몰려 강제로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뒤 상습 성폭행을 당한 최승우씨의 사례 등 형제복지원 입소과정에서 벌어진 불법행위와 복지원 내에서 벌어진 인권유린 행위를 상세하게 전했다. 부산시 문건을 찾아내 복지원이 원생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고 임금 170만 달러(약 19억5000만원)를 지급하지 않은 사실을 찾아냈다.

AP통신은 무엇보다도 ‘권위주의 정부 시절 벌어진 인권참사를 민주화 이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AP통신은 “정부 고위층에서의 조직적인 은폐로 인해 지금까지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된 성폭행과 살인에 대해 누구도 처벌 받지 않고 있다. 현 정부도 증거가 너무 오래됐다는 점을 들어 야당의 조사 요구를 가로막고 있다. 수천 명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보상은커녕 사과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정태 행자부 사회통합지원과장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은 2000년대 중반 설치됐던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에 자신과 관련된 문건을 제출했어야만 했다”며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졌던 만큼 각 사건에 대해 별도의 법을 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여준민 형제복지원대책위 사무국장은 “상당수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이 사건 당시 어렸고, 시설 폐쇄 이후 뿔뿔이 흩어져 사건의 피해를 증언하기 어려웠다. 국가로 하여금 주도적으로 피해 증거를 모으고 진상규명을 하라는 취지에서 법안을 발의한 것인데, 거꾸로 증거가 부족해서 어렵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AP통신의 상세한 보도가 나간 뒤 프랑스 르몽드, 영국 데일리메일, 독일 타게스차이퉁 등도 형제복지원 사건을 보도했다. CNN과 한 스페인 방송사도 이달 초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을 취재해 갔다. 진 의원은 AP통신의 보도가 나간 뒤 같은 달 28일 TBS 교통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엄청난 충격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아직까지 진상규명이 안 되고 있나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며 “우리나라가 점점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있고, 수많은 나라의 인권참상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설득력과 국가의 품격이 너무 떨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법은 2014년 3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서 발의됐다. 국회는 그해 3월 25일 진선미 의원 등 야당 의원 54명이 발의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법의 소관 상임위를 보건복지위로 배정했다. 법안이 보건복지위에서 다뤄지면 복지부가 관할할 수 있는 ‘시설비리’에 조사내용이 국한되고, 박 원장의 불법행위를 눈 감아주고 뒷돈을 받고 납치에 가담하기까지 한 정황이 있는 구청·경찰 공무원에 대한 조사는 손쓰기 어렵다며 피해 생존자들과 인권단체들은 반발했다. 진선미 의원실 측에서도 오늘날의 행정자치부에 해당하는 내무부 훈령이 형제복지원 문제의 발단이 된 만큼 책임져야 한다는 차원에서도 안행위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4년 8월 국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증언대회. / 박민규 기자

2014년 8월 국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증언대회. / 박민규 기자

신민당이 1987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85년 당시 형제복지원 수용자 3948명 중 3755명이 경찰에, 193명이 구청에 의해 끌려왔다. 1987년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이 구속됐을 때 부산시장이 직접 수사 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박인근을 풀어줘야 한다”고 지시했다. 복지재단과 부산시, 구청, 경찰 간의 유착관계는 형제복지원 진상조사 과정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법안은 7월 18일 재발의돼 안행위에 배정됐다.

행정부는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30년 전 부산 정·재계과 박인근 일가와의 비리 연계의혹 등을 캐내려면 비용이 많이 들고, 다른 유사 사건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의원실 측에서는 나름 합의를 시도해봤으나 장관 및 주요 보직자들이 바뀌자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은 지난해 5월에는 법안 통과를 요구하는 삭발농성을, 11월에는 단식농성을 진행했으나 이슈가 되지 않았다.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서 형제복지원 참상을 고발하는 한종선씨의 그림 전시회도 열었다. 그럼에도 국회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 의원은 지난달 28일 TBS 교통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창 논의될 때) 안전행정부(현 행자부)에서 계속 막힘이 있었다”며 “초기에는 유정복 당시 장관이 적극적이었지만 장관들이 네 번 교체되면서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다수당인 새누리당에서는 관계부처 간 협의가 되지 않았다며 심사를 계속 미뤘다. 2015년 11월 27일 안전행정소위 속기록을 보면 정종섭 행정안전부 장관은 “최대한 반영해서 논의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더민주의 한 관계자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시사고발 프로그램에 방영된 직후 국민적 관심이 뜨거웠으나 이를 이어가기 쉽지 않은 이슈다. 과거사인지라 관심 있는 정치인도 많지 않다. 부처에서도 반대가 거세다. 이런 이슈는 정부 차원에서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해결될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부산지역 초선 의원들이 좀 더 관심을 가진다면 20대 국회에서는 수월해질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1985~1986년 180명이나 사망

형제복지원에 부랑인들을 수용한 근거는 1975년 공포된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훈령 410호와 1971년 부산시와의 업무협약이었다. 내무부 훈령 410호는 걸인과 껌팔이 등 도시 빈민들을 광범위하게 부랑인으로 규정하고, 구청·경찰 공무원들이 동의 없이 이들을 강제로 수용시설에 입소시킬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전두환 정권 시기인 1980년대가 되면서 더욱 활발하게 시행된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부랑인들을 한곳에 가둬 도시의 범죄율을 낮추고 외국인들에게 깨끗하게 보이도록 할 목적이었다.

1986년 12월 초 김용원 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 검사(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변호사)가 울주군의 한 목초지에서 대규모 목장공사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수상히 여기면서 형제복지원 수사가 시작됐다. 박인근 원장이 형제복지원 입소자들을 공사현장에서 불법 감금해 강제로 노동에 동원했으며, 이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유린을 자행한 혐의가 조금씩 드러났다. 병원과의 석연찮은 거래 의혹도 있었다. 형제복지원 내부 문서에 따르면 1985~1986년 180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55명의 사망증명서를 의사 정명국씨(사망)가 발행했다. 정씨는 허위진단서를 발부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젊은 김 검사의 수사는 속도를 내씨만 곧바로 외압에 부딪혔다. 김 검사가 1997년 1월 17일 박인근 원장을 구속하자 이튿날 김주호 당시 부산시장으로부터 “박인근 원장을 빨리 풀어줘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검찰 내부로부터의 압력도 거셌다. 1987년 3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정권 차원에서는 민심이 들끓을 이슈를 최대한 만들지 않도록 덮고 싶어했다. 김 검사는 3000명이 넘는 수용자들을 감금해 목장 건설에 동원했으며, 정부 보조금을 횡령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부산시 공무원 및 정·관계 핵심인사들과의 유착 혐의는 손도 대지 못했다. 1심 법원은 징역 10년에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불법감금을 인정하지 않아 박 원장은 횡령에 대한 혐의만 적용돼 징역형 2년6월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6월 항쟁이 불붙으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은 역설적으로 관심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1988년 복지원 폐쇄로 4000여명에 달하던 원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2012년 출소 당시 9살이었던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의 국회 앞 1인 시위와

<살아남은 아이> 출간을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2013년 결성된 형제복지원대책위의 자체 조사 결과 현재까지 알려진 형제복지원 사망자 수는 551명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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