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축구] 영웅에서 배신자로

폴란드 대표에서 독일 대표로 뛴 빌리모프스키

07.05.15 21:33최종업데이트07.05.15 21:33
원고료로 응원
칼루자와 빌리모프스키1938년 파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유일한 남미 참가국 브라질은 “승리를 위해 왔다”고 호언장담을 할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비록 당시에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그늘에 가려 ‘넘버 3’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불참을 선언한 제3회 파리 월드컵에서 내심 우승을 기대하고 있었다.브라질로서는 첫 경기를 유럽의 변방 폴란드와 치렀다. 폴란드는 국제 대회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팀이었다. 1924년 올림픽에서 헝가리에게 0-5로 패하며 국제무대에 선을 보인 폴란드는 칼루자(Józef Kałuża)라는 뛰어난 감독의 지휘 하에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하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술버릇으로 폴란드축구협회에 의해서 대표팀에서 제외당한 폴란드 최고의 스트라이커 빌리모프스키(Ernest Otton Wilimowski, 1916-1997)가 그 대회에 참가했었다면 금메달도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폴란드의 축구 역사상 초창기의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는 빌리모프스키는 1916년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지방에 있는 실레지엔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의 나이로 국제대회에 처음 출전하였으며, 뛰어난 골감각을 높이 평가한 칼루자 감독에게 발탁되어 국가대표가 되어 폴란드 축구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폴란드와 빌리모프스키 빌리모프스키가 세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대회는 1938년 파리 월드컵이었고, 경기는 브라질과의 경기였다. 그의 화려한 등장은 아이러니하게도 폴란드가 패한 경기였다.브라질은 월드컵 첫 경기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힘겨운 승리 끝에 6-5로 간신히 승리하였다. 브라질로서는 혼쭐이 난 경기였고, 폴란드로서는 아쉬운 한판이었다. 이 경기에서 폴란드의 빌리모프스키는 혼자서 네 골을 기록하였고, 나머지 한 골도 페널티킥을 유도하는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빌리모프스키의 폴란드는 비록 한 경기만 치르고 탈락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인상적인 경기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월드컵이 끝나고 폴란드는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으며 꾸준히 실력 향상에 힘썼다. 그 와중에 벌어진 국제경기를 통해서 빌리모프스키는 팀이 승리할 때나 패할 때를 상관하지 않고 꾸준히 득점을 올리는 뛰어난 득점감각을 보여주었다.죽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스완송’에 맞게, 폴란드는 1939년 독일에 의해서 침공당하기 전인 8월 26일에, 마지막 국제경기를 헝가리와 치르게 되는데, 이 경기는 폴란드가 그 동안 보여준 수많은 국제경기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경기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폴란드의 축구영웅 빌리모프스키가 2-0으로 뒤지던 경기를 4-2로 역전시킨 경기로 유명한 데, 이 경기에서 빌리모프스키는 세 골을 넣고 한 골의 페널티킥을 유도하였다.이 경기를 끝으로 폴란드는 더 이상 국제경기를 치를 수 없게 되었다. 독일과 소련에 의해서 분할 점령된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구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독일과 빌리모프스키독일은 폴란드가 일체의 국제경기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폴란드의 축구 영웅 빌리모프스키는 축구를 위해서 자신의 조국을 떠나 독일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독일의 경찰로 복무하기도 하였다.빌리모프스키는 1941년 6월 1일, 독일 대표가 되어 루마니아와 첫 경기를 치렀는데, 두 골을 넣으며 4-1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 이후 10월 5일에 핀란드와의 경기에서도 그는 세 골을 넣으며 6-0의 승리에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 1942년 10월 18일, 베른에서 스위스를 맞아 독일은 5-3으로 승리했는데, 빌리모프스키는 다섯 골 중에 네 골을 기록하였다. 폴란드의 축구 영웅이 적대국 독일의 축구 영웅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빌리모프스키는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에 남게 되었다. 그는 폴란드 정부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고향인 실레지인 방문이 금지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1974년 독일 월드컵 기간에 폴란드 국가대표를 만나려는 그의 시도도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는 1997년 독일의 칼루스에(Karlsruhe)에서 네 명의 딸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근거 없이 지어낸 이야기 빌리모프스키가 폴란드 초기 축구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는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독일 대표팀과 폴란드간의 축구경기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 경기의 의도는 당시 폴란드 최고의 스포츠인 축구 시합에서 독일이 승리함으로써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폴란드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경기 전에 폴란드 선수들에게는 일부러 져주라는 협박을 한 뒤였습니다. 경기는 시작되었고, 폴란드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0-2로 뒤진 채 전반전을 마치게 됩니다. 경기장의 폴란드 국민들은 자국 선수들의 무기력한 플레이에 실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후반전이 시작되면서 한 폴란드 선수가 독일 진영으로 공을 몰고 돌진하는 모습과 동시에 폴란드 국민들은 환호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 선수가 찬 공은 자신의 나라를 짓밟은 나치 독일의 골문을 가르고 맙니다. 이 선수가 바로 1년 전인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폴란드 돌풍' 을 일으키고 브라질전에서 4골을 넣으며 세계적인 선수로 떠오른 빌리모프스키였습니다. 그 동안 나치의 협박에 못 이겨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하던 폴란드 선수들에게 빌리모프스키의 이 한 골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심어주게 됩니다. 이때부터 폴란드 선수들은 달라지기 시작했고, 결국 폴란드는 독일에 3-2로 역전승을 거두지만, 빌리모프스키를 비롯한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총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희생은 폴란드 국민들의 희망이 되었으며, 폴란드 사람들에게 축구를 축구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네이버 지식 검색).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MBC의 ‘서프라이즈’라는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이야기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독일은 세계 최강이 아니었고, 그러한 경기가 열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왜곡된 인생, 왜곡된 이야기 빌리모프스키는 1930년대에서 4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유럽에서 활약한 수많은 축구 선수 중 단연 뛰어난 선수였다. 그의 존재는 만약 제2차 세계대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1942년 월드컵이 개최되었을 것이고) 폴란드가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축구 선수인 그는 역사적으로 조국 폴란드가 독일에게 합병당하면서 왜곡된 인생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독일인이 되어 독일을 위해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가 되면서 조국 폴란드를 외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조국 폴란드가 독립을 다시 이루었을 때, 반대로 조국 폴란드가 그를 외면하였다. 그는 조국 폴란드의 죽음을 외면하였다는 오명을 죽을 때까지 벗지 못하였다.1930년대를 주름잡았던 유럽의 한 축구 선수는 이렇게 기억 속에 왜곡된 이미지로 혼란스럽게 존재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 U포터뉴스,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폴란드 빌리모프스키 칼루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